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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y 12. 2024

읽기 힘든 책, 낭독하며 즐기기

- 예전 글을 새롭게 다듬어 올립니다 -


고전이란 누구나 읽었으면 하지만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 글이다.     
- 마크 트웨인 -


몇 년 전 우연히 영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볼 때다. 


끝나는 순간까지 잠시도 화면에서 눈을 떼기 싫을 정도로 영화에 매료된 나머지, 원작을 찾아 읽기로 했다. 화면 속 주인공 ‘그레이’보다 ‘헨리 워튼 경'을 맡은 콜린 퍼스가 마음에 들어서다.  


아... 

그런데 뭐가 잘못된 건지...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순진한 청년 그레이를 꼬드기려 하는 헨리 워튼 경의 말이 영화에서처럼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꼰대의 잔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다른 19세기 작품과 마찬가지로 고어와 만연체가 등장하니 읽어내기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에서 그려진 화려한 배경이나 매혹적인 주인공의 대사가, 책에서는 장황한 묘사와 끝없는 독백으로 다가왔다. 발행된 지 오래된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온 터라 활자마저 내 눈에 친근하지 않았다. 19세기 문학의 위력에 눈꺼풀이 감겨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오스카 와일드에게 큰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읽기 힘든 책은 안 읽으면 그만이지만, 첫머리에 인용한 글처럼 ‘읽었으면 하는’ 고전 도서를 읽을 이유는 내게 다분했다. 영어 전공자니까, 또 영국에 사니까 이 정도는 읽어야지, 하는 의무감도 발휘되었겠지만 영어로 된 작품을 읽고 소양을 쌓으며 번역가에게 무기가 될 문장력과 어휘를 얻겠다는 실질적 목표도 있어서다. 경험상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기만 하면 내게 감동과 재미, 지혜를 주기도 했다.  


학부모가 되고 보니, 이런 고전 도서가 아들 또래가 읽어야 하는 필독서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숙제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아들이 공부하는 영어 문제집에 지문으로 나오고 졸업 시험에도 출제되는 작품이라면 읽어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를 실천하기에 앞서 꼭 명심할 사항이 있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아이에게 강요하지 말자!"


나의 자녀 교육 방침이다.


부모가 먼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야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먼저 독서를 하면 ‘독서하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이가 따라 한다. 같은 이유로, 내가 읽기 힘들어 덮어버린 책을 ‘너는 읽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 


그렇다고 두 모자가 한꺼번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싶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자리에 서있기까지 하며 나 홀로 독서를 시도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소리 내어 책 읽기를 시도하게 되었다. 즉, 낭독 (Read aloud)이다. 시험공부하듯 어려운 글을 집중해 읽을 때 내가 주로 쓰는 방법이다. 얌전히 있던 아들까지 끌어들이며 말이다.


학원도 안 다니는데 이 정도 책은 읽어야 졸업 시험을 치르지 않겠냐는 핑계를 댔다. 비록, 이 어미는 혼자 해보고 실패했다만...



"혼자 하기 힘들어 그러는데 엄마 도와줄래?"


처음에는 하루 4쪽 읽는 것으로 협상이 되었다. 장편소설을 하루 4쪽만 읽어서는 진도가 제대로 나가기 힘들지만, 그렇게라도 하는 편이 책장을 넘기지 못해 책 전체를 포기하는 것보다 낫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이미 읽고 있는 책도 많고 학교 숙제도 있는데'라며 못마땅해하는 아들의 불만을 줄이려면 그 정도 선에서 합의를 봐야 했다. 


동일한 책을 두 권 가져다 놓고 아들과 내가 한쪽씩 번갈아 소리 내어 읽는 방식이었다. 처음 시도할 때만 해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책을 완독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했다. 혼자 읽을 땐 집중하기 힘들던 만연체의 예스러운 문장을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읽으며 눈꺼풀이 감기는 일을 예방한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그랬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중학생 나이가 되고부터 영어 실력이 엄마를 앞지른다 자부하는 아들과 설마 그럴 리가 있냐로 받아치는 내가 경쟁하듯 읽다 보니 발음과 억양에도 신경 쓰고 등장인물의 감정까지 최대한 살려가며 읽었다. 감독의 눈에 띄어 배역하나 따내려 애쓰는 신인 배우들의 기싸움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두 모자의 실력을 판가름해 줄 감독은 없어서 아쉽다만 나중에는 이도저도 따지지 않고 읽기에만 몰두하다 보니 멈추기 싫을 정도로 책에 빠져들었다. 


아들과 함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낭독한 지 일주일이 될 무렵, 영화 속 장면이 하나씩 떠오르고 주인공의 대사가 연상되어 다시금 영화를 보는 듯했다. 


눈으로만 읽던 책을, 눈으로 읽고 입으로 소리 내고 귀로도 들으니 훨씬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단순히 엄마가 내주는 숙제를 하듯 의무적으로 대하던 아들이 차츰 엄마와의 영어 실력 겨루기로 가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자신도 무대에 서는 배우 못지않구나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읽어갔다.    



함께 낭독하다가 실랑이를 벌이다


두 모자가 책 낭독에 한창 흥미를 가질 무렵이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기대하며 내가 먼저 한 페이지를 읽고, 뒤이어 아들이 읽는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하루 목표치에 도달했다. 낭독에 흥미를 가지면서부터 4쪽은 너무나 아쉬운 분량으로 다가왔고, 매번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책을 덮어야 했다. 


그래서, 읽는 분량을 5쪽으로 늘리면 어떻겠냐고 아들에게 슬쩍 물어봤다. 읽을 분량이 늘어난다고 하니 아들이 경계는 했지만, 4쪽에서 5쪽이면 문제없겠지,라고 여긴 뒤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읽어야 할 쪽수가 짝수에서 홀수가 되자 또 문제가 발생했다. 


"지난번에 엄마가 먼저 시작해서 한 페이지 더 읽었잖아요. 이번엔 내가 먼저 읽을 차롄데요."

"아니야, 엄마가 읽을 차례야."


매번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 논쟁이 벌어졌다. 


"우리 싸우지 말고 이제부터 5쪽 대신 6쪽으로 하자. 그럼 짝수니까 헷갈리지 않잖아."


아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아닌데 싶었겠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결국, 어렵사리 4쪽으로 시작한 아들과의 낭독이 어느덧 하루 8~10쪽 분량에 이르렀다. 책마다 분량은 다르므로 매번 쪽수를 조절하여 30분 이내에 낭독을 마치도록 했고 아들도 이미 큰 불만 없이 받아들이는 단계였다.


책 읽기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우선, 나와 아들이 하던 작업을 이제는 남편과 아들이 맡고 있다. 코로나 시대로 접어들면서 남편은 재택근무로 아들은 재택수업으로 일상을 보낼무렵 생겨난 변화다. 


집에서만 지내면서 남자들이 너무 심심해하길래 - 이건 두 남자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 내가 제안했다. 


삼식이들의 식사와 간식까지 챙기며 일도 하려니 시간이 부족해서다. 또한, 이미 1년 동안 진행된 아들과의 책 읽기 훈련 덕택에 나 혼자 힘으로도 고전 도서를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몫했다.





↑ 두 남자의 첫 낭독 프로젝트로 '위대한 개츠비'를 추천해 줬다.


남편의 출장과 가족 여행, 아들의 학교 행사로 책 읽기에 차질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추진한 결과 올해로 5년째 이르는 두 남자의 낭독으로 그동안 50권가량의 책을 읽었다. 


가족과의 낭독 프로젝트에는 물러났지만, 나는 두 남자가 읽을 책을 추천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이 읽을 만한 책을 찾기 위해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기분 좋은 '부담감'을 떠안고서 말이다. 책 선택 과정에 두 남자의 의견도 적극 반영하고 있다.


책 낭독의 임무를 처음 맡겼을 때만 해도 '내게 왜 이런 시련을 떠넘기나?'라고 절망적 반응을 하던 남편이다. 그래서인지, 코로나로 시작된 강제 재택근무 체제에서 벗어날 무렵, 남편이 자연스럽게 낭독의 임무도 반납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두 부자는 지금도 함께 책 읽기를 진행하고 있다. 책 낭독에서 오는 행복감이 크기 때문이리라. 혼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던 어려운 책을 술술 읽어내니 남편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저녁마다 책을 낭독하며 느끼는 부자간의 교감도 무시할 수 없다. 


아들과 남편 둘이서, 또 나 혼자 단독으로, 낭독을 맡은 구성원은 달라졌지만 우리 가족의 책 프로젝트는 이어진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혹은 혼자서라도 낭독하며 책을 읽어보자. 전혀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Vitaly Gariev on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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