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책 <죄와 벌>을 아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검색하던 중 페이지 수가 다른 버전을 여럿 발견하고 의아해하던 중이었다.
동일한 책이라도 양장본이냐 문고본, 전자책이냐에 따라, 또 책 규격이나 활자, 행간, 삽화 등 편집 방식에 따라 쪽수가 차이 날 수는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인쇄 방식에서 생겨나는 분량의 차이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다. 내가 목격한 책의 쪽수는 거의 두 배 넘게 차이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지나치게 차이 나는 책 2권을 하나씩 분석해 보았더니 하나는 원본이요, 다른 책은 축약본이었다. 원본이 600쪽 정도인데 이를 축약해 200쪽 남짓한 규모로 만든 것이 다른 책이었다.
<죄와 벌>처럼 출판 역사가 길고 저작권마저 소멸된 책일수록 버전이 더 다양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작가가 쓴 글을 책에 모두 담는 것이 원칙이 아닐까 싶지만, 사실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책을 돌이켜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흔했던 것 같다.
↑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바탕으로 만든 동화책
누구나 어린 시절 책이나 TV 만화로 한 번쯤 보았을 작품일 테다. 이런 동화책이 대표적인 축약본에 해당한다. 천 페이지 가량의 원본 소설을 초등학생에게 읽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 동화책 수준으로 축약한 것이다.
<돈키호테>가 아니더라도 장편의 고전도서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게 축약하여 <xxx 어린이 세계명작동화>, <OOO 초등학생이 읽어야 할 고전> 등의 제목으로 나온 전집이 웬만한 가정의 책꽂이에 꽂혀 있으리라.
원본의 내용을 추려서 만들었음에도 책 표지나 책 소개에는 직접적으로 그런 정보가 없다.
초등학생을 위한 동화책이라는 점과 원본에 비해 대폭 줄어든 분량을 고려하면 축약본임을 짐작할 수는 있다. 또한, 책 작업에 참여한 이에 관한 정보로도 해당 책이 외국 서적을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 수준에 맞게 재구성하였을 알 수 있다.
영어 도서에도 이처럼 원문을 그대로 담은 책도 있고 필요에 따라 축약한 버전도 있다.
그런데, 책 표지나 책 소개에 원본인지 축약본인지를 알리는 영어 단어가 나오므로 이를 미리 익혀두면 책을 검색할 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나처럼, 저자가 쓴 원문을 고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책을 찾던 중 축약본까지 집어들 수도 있으니.
'원본', '축약본' 등 영어 도서를 검색할 때 익혀두면 유익한 영어 3가지를 이 자리에 소개하겠다.
Abridged
* 생략한, 축약한
↑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 크리스토 백작>
총 1300여 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로, 지금껏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길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축약본이 나와 있다. 이렇게 원본의 내용을 축약하여 만든 책을 가리키는 용어가 Abridged이다.
축약본은 어린이만을 독자로 삼지 않는다.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읽어내기 부담스러워하는 건 성인도 마찬가지니. 간단하게나마 책 내용을 알고자 하는 이를 위해서도 축약본은 필요하다.
반드시 원작 그대로 읽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축약본을 골라볼 만하다. 개인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이런 방식으로 읽은 적 있다. 해당 작품을 발레로 표현한 공연을 보기 위해 급하게 책을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원작은 900 페이지가 넘는 장편이라 일주일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엄두를 내지 못해서다.
한국의 오디오북 소개에도 해당 작품이 축약본임을 구분해 놓은 경우를 볼 수 있다.
↑ 이기주의 에세이집 <말의 품격>
총 200쪽이 넘는 책을 오디오북으로 재생하면 최소 6시간이 넘는 분량이 되지만, 위 오디오북은 요약본이라 2시간 남짓한 길이가 되었다.
책을 축약한 버전이 있다면 축약하지 않은 원본임을 알리는 표현도 있어야겠지.
Unabridged
* 원문 그대로
도서를 축약하지 않고 원본 그대로 담았다는 말이다.
↑ 진 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
여기서 원본이라고 하면, 작가가 집필할 때 쓴 언어로 된 작품뿐만 아니라 이를 다른 언어로 옮긴 번역본까지 포함한다.
한글 오디오북의 경우 원본을 그대로 다 읽어낸 경우 '완독'으로 구분한다.
↑ 박완서의 소설 <미망>
종이책으로는 354쪽에 해당하는 장편 소설인데 이를 오디오북으로 재생하니 13시간이 넘는다.
Read by full cast
* 모든 출연진이 낭독
Dramatisation
* 극화
종이책이 아닌 오디오북에만 해당하는 용어다.
오디오북이라고 하면 대체로 한 명의 성우가 작품 전체를 낭독하는 방식을 쓰는데, 작품에 따라 여러 명의 성우가 등장하는 오디오북도 있다. 특히, 소설을 드라마 형태로 극화한 작품이 이런 예에 해당한다.
작품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작품 길이도 줄어들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책도 일종의 '축약본'이라 할 수 있다. 방대한 분량의 장편 소설이 극화되면서 2시간 전후의 드라마로 재탄생한다.
장편의 작품이라 다 읽을 시간도 없고 내용 이해도 힘들 수 있지만, 드라마판의 경우 짧은 시간 안에 작품을 감상하고 내용 이해도 쉬워지는 장점이 있다.
↑ 루이자 메이 알코트의 소설 <작은 아씨들>
500여 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을 드라마 형식으로 낭독하여 2시간이 조금 넘는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한글 오디오북에서는 소설을 극화한 작품을 '드라마'로 구분한다.
↑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
292쪽의 장편 소설을 드라마로 극화하면서 3시간이 조금 넘는 분량이 되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Jessica S. Irvi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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