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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r 31. 2024

책 좋아하는 아이로 성장하기

- 예전 글을 새롭게 다듬어 올립니다 -


"시험이 끝나면 셰익스피어 책을 읽으려고요."


몇 해 전 졸업시험을 앞두고 있던 아들이 한 말이다.


영국의 중등학교 학생은 졸업시험이 끝나면 학기가 한 달여나 남았음에도 졸업을 한다. 그래서, 9월에 시작되는 대학준비반 개강까지 두 달 반가량 공백이 생기는데, 이 시간 동안 무얼 할 계획이냐 질문했더니 아들이 앞서와 같이 답했다. 


대학에서 수학과 컴퓨터를 전공하려는 이의 관심사가 셰익스피어에만 있을 리 없다. 그 외 더 많은 계획도 밝혔지만 내 관심을 끌었던 대답은 셰익스피어 책 읽기였다. 


졸업시험 과목으로 지정된 맥베스를 공부하면서 셰익스피어에 흥미가 생겼다고 한다. 


이로부터 몇 개월 뒤, 마침 서점의 신간 코너를 둘러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들이 셰익스피어 책을 하나 추천해 달라고 했다. 


영화나 라디오 드라마, 문고본의 형태이긴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주요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 자부하는 엄마의 의견을 듣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거창하게 밝혔던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고 있음을 과시하고자 한 말인지도 모른다. 


본심이야 어떻든,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곧바로 <폭풍우>를 추천해 줬다. 작가의 마지막 희곡 작품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셰익스피어 전문가 흉내도 내고.


졸업시험이 끝나면 더 이상 영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아들이다. 대학준비반에서는 입시와 관련된 서너 과목만 집중적으로 공부하니까. 


영문학을 전공할 것도 아니면서 영국인도 어려워하는 셰익스피어를 자발적으로 읽으려 하다니. 아들이 책을 좋아하게 된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 애가 안 읽는 책이라서 말이야..." 


A의 엄마가 동화책 전집을 챙겨주며 말했다. 


영국에 살면서 한글책 구하기가 쉽지 않아 늘 아쉬웠던 지라, 나는 잘 읽겠노라 감사의 인사를 몇 차례나 전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A도 열심히 읽은 뒤 물려주는 책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서다.


A의 집 거실은 온통 책으로 가득한데 특히 전집류의 책이 주를 이루었다. 과연 저 많은 책을 다 읽을까 싶을 정도로 많았다. 읽지도 않은 책이 다른 집으로 넘어가든 말든 A는 별 신경도 안 썼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80년대에는 전집류 책 구매가 흔했다. 그런 형태의 책이 필요해서라기보다 어떤 책을 사야 할지 정보가 부족하고 도서관 이용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을 때라 그랬으려니 짐작해 본다. 또한 집집마다 유행하는 구매 형태이기도 하고 책 판매를 하는 지인의 부탁으로 얼떨결에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르고도 A의 집 거실이 온통 전집으로 덮여 있다니.  



<아이가 직접 책을 고르게 하자>


책을 고른다고 해서 온라인 서점을 검색하는 방식은 아니요, 아이가 읽을 만하다 싶은 책을 부모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방식도 아니다. 


아이와 함께 도서관이나 서점을 직접 방문하여 종이로 된 책을 아이 스스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게 하는 방식이다. 


동네 도서관의 어린이책 코너에 가보면 아이의 몸집에 맞춘 작은 소파나 의자, 책상이 놓여있고 주변에는 장난감이 배치되어 있다. 동화책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의 포스터나 모형, 인형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초등학생 아이가 혼자 조용히 책을 읽기도 하고, 더 어린 아이는 부모가 읽어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라도 이런 풍경을 자주 접하면 자연스레 책에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출산 후 외출이 가능해질 무렵 나는 아들을 데리고 운동삼아 또 읽을거리를 찾아 도서관에 다니곤 했다. 덕분에 아들은 아기 시절부터 도서관 풍경에 친숙해졌다.


막 돌을 지날 무렵 아들은 자기보다 서너 살 많은 또래가 읽을 책 코너에 달라붙어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내 아들은 천재가 아니다. 


글자를 읽기는커녕 책에 대한 개념도 명확히 성립되지 않은 시기에 책을 고르겠다며 고집을 부리길래 내버려 두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책을 펼치다가 찢어버리거나 침이라도 흘리지 않나 옆에서 감시하며 나도 책을 골라야 했다. 


이럴 때면 아들이 고른 책과 내가 고른 책을 모두 챙겨 대출대로 갔다. 아들의 선택을 존중해 줌을 드러내는 의도였다. 가족 모두 도서관 카드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한 명당 최대 30권씩 대출할 수 있던 시절이다. 아들이 당장 읽을 수 있든 없든 모두 빌릴 여유가 되었다.


일단 책을 집에 가져오기만 하면 아들은 자신이 고른 책과 엄마가 고른 책을 구별하지 못했다. 내가 읽어주는 책이 모두 자신이 고른 책이라 착각하는 듯했다. 


"역시, 내가 책 고르는 안목 하나는 뛰어나단 말이야." 


아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했겠지.


글자를 배우고 혼자 책 읽는 실력이 점차 늘자 아들의 책 고르기 태도도 진지하게 변해갔다. 이미 독서의 재미에 흠뻑 빠져든 상태였다.



"제가 요즘 눈이 아파서 책을 못 읽어요."


영화를 주제로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해당 영화도 재미있지만 원작이 훨씬 더 재미있다고 내가 책을 찬양하고 나섰다. 아쉽게도 B는 '눈이 안 좋다'는 말과 함께 책에 흥미가 없음을 내비치길래 더 이상 책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다만, 퇴근 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저녁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의아해했다. 스마트폰 화면도 눈에 안 좋을 텐데, 하고 말이다. 


자신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책을 읽을 수 없지만 딸만큼이라도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은 강해 보였다.



<부모가 먼저 독서를 하자>


자녀의 독서를 권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아닐까 싶다.


B처럼 자녀가 책을 안 읽는다 걱정하면서도 정작 부모 자신이 책을 안 읽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부모가 하지 않는 독서를 아이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 



"약물로 행복감을 느끼며 고통과 질병이 없는 세상에 사는 것이 왜 문제라고 생각하나요?"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읽은 뒤 아들이 던진 질문이다. 


주말을 맞이하여 가족끼리 독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출판된 지 9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충분히 관심을 둘 만한 주제가 담긴 책이니 누구나 한 마디씩 거들 수 있었다.



<아이와 함께 책에 관한 대화를 나누자>


우리 가족은 책을 한 권씩 정해 비슷한 시기에 같이 읽고 토론을 벌인다. 


물론, 자녀와 책 대화를 나누겠다는 이유만으로, 완독하기 까다로운 고전 도서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 온 가족이 동일한 책을 읽는다는 목표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 이런 방식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자녀의 독서 행위에 관심을 가지는 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들이 훨씬 더 어렸을 때는 지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책 대화를 나누었다.



"어..."

"매카패카"  

"어..."

"툼리부" 

"어..."

"업시 데이지" 

"어..." 

"이글피글"

"어..."

"핑키 풍키 멍멍키 v@$%"



어느 제3세계 오지 마을에서 희귀 언어로 나누는 대화인가 싶겠지만, 한국어와 영어다. 아들은 "어"라는 말로 짤막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하곤 했다.


마트 옆에 위치한 상점이 말썽이었다. 아들 또래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BBC 어린이 방송 <In the Night Garden> * 의 캐릭터 상품이 대문짝만 하게 전시된 어린이 용품점이었다. 


* 한국에서는 <꼬꼬마 꿈동산>이라 소개된 방송이다.


다행히 캐릭터 상품을 사달라 조르지는 않았지만, 아들은 이 상점을 도서관으로 인식한 듯했다. 장난감이 놓인 전시대보다 동화책이 먼저 눈에 띄어서다. 이곳을 지날 때면 입구에 놓인 책을 펼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더러 읽어달라고 했다. 


"어..."

(이건 뭐예요?)

(이 캐릭터 이름은 뭐예요?)

(여기 뭐라고 적혀 있어요?)


아들이 펼친 페이지에는 캐릭터 사진만 있을 뿐 글자가 없었다. 나더러 어쩌라고?


글자 유무를 알지 못하는 아들은 계속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내게 대답을 종용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머리를 짜내어 기억나는 대로 캐릭터 이름을 말해줬다. 아들과 함께 자주 보던 방송이긴 하지만 캐릭터 이름을 줄줄 외울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길다 싶은 이름, 그것도 조연급 캐릭터의 이름은 대충 얼버무려 말하기도 했는데 아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평소처럼 엄마에게 책을 읽어달라 했을 뿐임에도 결과적으로는 나의 기억력 테스트가 되고 말았다. 테스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캐릭터 중 한 명이 등장할 때마다 부르는 노래마저 나더러 불러달라고 했다. 사람들로 분주히 오가는 쇼핑가에서 말이다. 


"어... 어..."

(엄마, 노래도 불러야죠)


♬ 업시 데~이지 두우~  업시 데~이지 두우~ ♪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캐릭터 이름을 임기응변으로 둘러대고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얼굴을 붉혀가며 노래 부르던 그 시절 기억을 들려주면 아들은 그런 요구한 적 없노라 잡아뗀다. 


엄마는 시험공부하듯 외웠던 캐릭터 이름과 노래를 전혀 기억 못 한다고? 

아들, 너무하잖아!


커버 이미지: Photo by Stephen Andrew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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