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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r 18. 2024

오디오북의 세계에 빠져들다

"이번에는 무슨 책 읽고 있는데요?"


방으로 들어온 아들이 나를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이제 막 시작해서 무슨 책인지 몰라."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골랐다고요?"

"콜린 퍼스가 읽어주거든."


콜린 퍼스라는 이름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그 이름 하나면 나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겠나 싶어 한 말이지만 아들은 오히려 실소만 터뜨렸다. 


평소 엄마의 책 고르는 안목을 칭찬해 주던 녀석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의 작가나 책 제목이지만, 두터운 두께에 압도당하거나 난해한 내용 때문에 선뜻 고르기 힘든 책도 간혹 완독 해내는 엄마의 능력에 감탄하기도 한다. 그런 엄마가 내용도 모르고 저자도 모르고 오로지 좋아하는 배우가 읽어준다는 이유로 책을 고르다니 기가 막히나 보다.


오디오북으로 독서를 시작한 지 6년 정도 되면서 그동안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나의 독서 패턴이 변한 건 사실이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오디오북 독서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독서를 의존하는 방식이 되었다. 


아직 활자를 읽는 형태의 독서 방식은 일부 유지하고 있다.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으로 말이다. 오디오북으로 구하지 못하는 책이거나 오디오북으로 들은 후 다시 눈으로 읽고 낭독하며 천천히 음미하고 싶을 정도로 글이 아름다운 책에 한해서다.


종이책은 이제 전혀 읽지 않는 셈이다. 이 또한 내가 독서 방식을 바꾸면서 생긴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사 모은 노력과 돈이 아까워 계속 책장에 보관해 두긴 했지만 오디오북의 매력에 빠진 이후 계속 공간만 차지하고 있던 종이책을 결국 집안 정리를 할 때마다 조금씩 모아서 자선단체에 기증하기도 하고 주변에 나눠주기도 했다. 


남편과 아들은 아직 종이책을 읽고 있으니 우리 집 책장이 완전히 비는 일은 없을 테다. 아들의 한글 교육을 위해 한국에서 직접 사 오거나 다른 한인 가정에서 물려받은 책도 계속 보관할 계획이다.


독서 패턴을 완전히 바꿔버릴 정도로 내가 오디오북에 푹 빠진 이유를, 즉 오디오북의 장점을 이 자리에 소개할까 한다.



오디오북 장점 1. 독서 환경에 제약이 적다.


전통적인 종이책으로 독서를 하려면 조용함과 적절한 조명, 앉을자리가 확보되어야 하지만, 오디오북은 이런 제약이 없다. 


오랜 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보내는 프리랜서라 독서할 때만이라도 엉덩이를 바닥에서 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오디오북을 접하면서 이런 바람은 쉽게 성취되었다. 


서랍장이나 책꽂이 등 내 눈높이에 맞는 공간에 휴대폰을 올려두고 그 옆에 서서 오디오북을 듣는 것이 내가 주로 하는 독서 방식이다. 팔다리가 자유로우니 책에 집중하면서도 간단한 체조도 하고 좁은 공간을 반복적으로 오가며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 전자책을 읽을 때도 같은 위치에 휴대폰을 올린 뒤 활자를 크게 확대해 읽기도 한다.


어떤 때는 정원을 돌아다니며 혹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오디오북을 듣고 기분 전환도 한다. 간단한 요리를 하거나 청소를 할 때도 빨래를 걷어 정리할 때도 독서가 가능하다. 


무심코 흘려버릴 만한 시간까지 독서에 활용하니 독서량이 현저히 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디오북 장점 2. 휴대와 보관이 간편하다.


장시간 교통편을 이용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 제법 있으리라. 


문제는 책을 운반하는 일이다. 짧은 여행이나 출장에 책을 서너 권씩 읽을 여유는 없겠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여러 책을 동시에 읽을 수도 있다. 또 여행이나 출장이 일주일 이상 길어지는 경우 책을 여러 권 준비해 둘 필요가 있는데, 이미 옷과 여행 필수품으로 가득한 가방에 책을 서너 권씩 넣는 건 부담스럽다. 


여행이나 출장이 아니더라도 뜻하지 않게 2~3시간씩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도 책이 있으면 유용하다. 이런 때 종이책을 미리 챙기는 건 생각지 못할 수도 있지만 요즘 휴대폰은 누구나 가지고 다니지 않는가. 읽고 싶은 책을 앱으로 미리 다운로드만 해두면 인터넷 연결이 되는 공간에서도 독서를 할 수 있다. 



오디오북 장점 3. 눈을 보호할 수 있다.


내가 오디오북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다.


40대 중반으로 들어설 무렵 작은 글씨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직 웬만한 활자는 다 읽어내고 또 병원에서도 노안은 아니라고 했지만, 눈이 쉽게 피로해지는 등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최소 40년은 더 써야 할 소중한 눈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 싶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작업하는 프리랜서 일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컴퓨터 못지않게 눈을 피곤하게 만드는 독서 방식이라도 바꾸면 어떨까 싶었다. 


내가 오디오북에 관심을 가지기 전, 세상은 이미 오디오북의 편리함을 깨달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카세트테이프와 CD 형태의 책이 널리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노인층이 주요 고객일 거라는 선입관으로 이를 멀리하다가 종이책 독서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음을 깨달은 시점에서 오디오북으로 바꾸고는 지금껏 계속 이용하고 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겠지.



오디오북 단점 1. 중요한 문장이나 단어가 나와도 메모를 할 수 없다.


책을 읽다가 감동적인 문장을 발견하면 펜으로 표기해 두고 나중에 다시 찾아 읽거나 이를 별도로 노트에 기록하고 싶을 때가 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고 그렇게 익히게 된 단어도 나중에 다시 알 수 있도록 표시하고 싶을 때가 있다. 


오디오북을 들으면 이런 메모를 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파리 대왕>을 읽던 중 Vicissitude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문맥으로 의미와 철자를 파악할 정도의 단어가 아니었다. 이런 때는 단어 앞뒤로 흘러나오는 문구를 입력해 검색하면 무슨 단어인지 알 수는 있다. 종이책이라면 이런 수고가 필요 없지 않은가. 


<드라큘라>를 읽을 때 'bloofer lady'라는 문구가 소설 중반부터 반복적으로 나온 기억이 있다. 'beautiful lady'를 어린아이들이 엉뚱하게 발음해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오디오북으로 들으면서 이를 'blue fur lady'라 착각했다. 파란 털옷을 입은 여자. 



오디오북 단점 2. 등장인물의 이름을 정확히 모를 때가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저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영어 오디오북으로 들을 때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일과 소련이 벌인 전투에 참전한 여성의 경험담이 주요 내용이다. 남성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전쟁을 바라본 이들의 경험담이다.


녹취록 주인공이 바뀔 때마다 이름이 소개되는데, 소련 구성국에 속한 국가 출신이라 낯설게 들리는 이름뿐이었다. 벨라루스 출신인 저자의 이름 또한 귀로 들어서는 금방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지 않은가. 


다행히 이 책은 앞뒤 사건이 연결되어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픽션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여성, 소련이라는 공통점에서 시작된 저자의 오랜 여정을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 전하는 글이기에 전체 흐름에서 사람의 이름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이런 이국적인 이름이 등장인물로 나오는 소설이라면, 이름의 발음만 듣고 누구인지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오디오북 단점 3. 등장인물 간 소통, 상황 변화를 알아채기 힘들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주고,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글이다. 


허생원과 조선달이 주고받는 말이지만 허생원의 마음은 딴 데 가 있다. 상대를 부르는 호칭이 있으니 그나마 대화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귀로만 이 글을 전해 듣는다면 금방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앞서 말한 것처럼 등장인물의 이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단계라면 말이다. 


성우 한 명이 이 글을 낭독한다면 허생원과 조선달 목소리를 번갈아 가며 내야 한다. 단순히 지금 읽고 있는 단락 내에서 화자를 구분하는 정도가 아니라 작품 초반부터 끝까지 각 인물의 목소리를 일관되게 유지하며 말이다. 


천 페이지 가량의 장편소설도 한 명의 성우가 읽어 줄 때가 있는데 이런 긴 소설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작품 초반에 들려준 목소리와 일치했다. 아마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녹음 자료로 보관해 두고 수시로 참조하지 않을까 싶다. 작품 속에서 세월이 몇십 년씩 흐른다면 각 목소리도 조금씩 노쇠해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같은 허생원 목소리라도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조선달에게 건네는 목소리와 처음 만난 사람이자 어쩌면 중요한 인연이 될지 모르는 동이에게 떨리듯 전하는 목소리는 다르다. 


중간에 화자가 바뀌고 감정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우가 끝까지 똑같은 목소리로 일관한다고 생각해 보라. 앞뒤 문맥으로, 이름 언급으로 의미는 파악할 수 있지만, 오디오북으로는 불편한 독서 방식이다.


그동안 읽은 오디오북에는 복잡한 내용 구분을 성우 한 명이 완벽하게 담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런 구분을 힘들게 하는 성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성우 목소리에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장단점 때문에 오디오북 고르기가 만만치 않지만 이를 알면서도 오디오북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Lena Kudryavtsev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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