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손길 #소개팅 #페르소나 #불안
수아는 처음부터 J가 마음에 들었다. 체크 남방, 에코백, 복사뼈 아래까지 오는 양말,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하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에 놀리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올라왔다. 평소 말이 적고 수줍음이 많은 그녀에게는 태엽이 하나 있다.
'나는 명랑하고, 가벼운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자 다짐. 그 태엽이 돌아가는 동안 수아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릴 적 그녀는 이 태엽의 존재를 몰랐다. 그래서 자신이 이중인격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시커멍, 시커멍!"
단짝 친구 선희와 있을 때는 그녀는 장난꾸러기였다. 말도 안 되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친구를 놀리고 꼬집고 때리고 도망치고 맞아도 좋다고 웃는다. 까불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어깨가 으쓱했다. 하지만 선희가 결석하는 날이면 그녀는 다른 아이가 되었다. 선희 없는 교실이 어색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리에 앉아 책 읽는 척을 했다.
"야, 오늘 장독대 왜 안 오는데?"
"....."
친구들이 선희를 찾는다. 해나가 옆에 와 앉는다. 그녀는 시선을 느꼈음에도 모른 척 책을 본다. 해나를 무시한 건 아니었다. 선희가 없을 때는 해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불편한 침묵. 해나는 잠시 앉아있다 가버린다. 조용지만 무례한 아이. 그 후로 해나는 선희가 없을 때 그녀에게 오지 않았다. 그리고 선희가 오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듯 함께 어울렸다. 선희가 없으면 그녀는 태엽이 풀린 인형이었다. 주변에 관심도 흥미도 없는 척 책을 읽었다. 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은 것이 아니었다. 무심하지 못한 신경은 온통 외부를 향해 있었다.
수아는 이런 일관성 없는 태도가 이중인격이 아니라 수줍은 본래 성격 때문이라는 것을 성인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인정하기 싫었으니까. 부끄러움이 많고 예민한 실제 자기 모습이 싫었다. 그녀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해하는 만큼 사람들도 그녀를 불편해했다. 차라리 아예 모르는 사람과 있을 때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태엽을 감으면 상황은 바뀐다. 태엽이 돌아가면 사람들은 장난기 많은 그녀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티키타카가 될 때 느낄 수 있는 안정감, 즐거움. 하지만 그녀는 태엽이 멈추기 전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감아도 태엽은 언젠가 멈추게 되어있으니. 그러면 사람들의 태도도 변하겠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난 심각하지 않은 가벼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어야 해.'
J와 함께한 시간이 마법처럼 흐른다. 5월 밤공기가 푸르다. 진지한 질문에도 가벼운 농담으로 말을 넘긴다. 당황하는 그를 보면 재밌다. 놀리기 좋은 사람이다.
"엄청 밝네. 인기 없는 스타일이 아닌데 왜 연애 안 해요?"
그녀는 J의 말에 불안해진다.
"...... 우와. 한 시 넘었다. 이제 가요."
버스에 앉아 창 밖의 J에게 손을 흔든다. 아직 태엽이 돌아가고 있음에 안도한다.
다음 날, J는 선물이라며 어제 찍은 사진들을 그녀에게 보냈다. 푸른 밤의 습기가 느껴졌다. 벽에 비친 둥근 조명 빛이 하얀 달 같았다. 사실 기뻤으면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부러 말을 피한 건 아니었다. 두려웠다. 태엽은 쉬지 않고 돌아갈 수 없으니까. 실재가 아니니까. 그녀는 다시 교실에서 혼자 책 읽는 척하던 꼬마가 된다.
"또 나만 얘기하고 있네."
"비밀이 많은 사람 같아요."
"......"
시간이 흐른다. 더 이상 연락은 오지 않는다.
'해나야. 난 아직도 자라지 못했나 봐.'
아프다. 명치가 조여 온다. 앉아있기가 힘들다. 허리를 필 수조차 없다. 식은땀이 난다. 이 상태로는 운전도 무리다.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내과가 어디였더라. 이건 그냥 먹기 싫은 도시락을 억지로 먹어 탈이 난 거다. 단호박, 당근, 완두콩이 잘 섞이지 못했던 그 맛없는 냉동밥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어디 아파?"
휴게실에 엎드려 있는 그녀를 보고 사수가 묻는다. 대답하기 싫다. 그냥 이대로 누워있고 싶다. 끼익끼익 태엽을 돌린다. 눈, 허리, 입꼬리.
"완전 신기해요! 저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한 거 같아요. 명치를 쥐어짜는 느낌?"
"약은 먹었어? 내일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아싸!"
"어이구, 빨리 조퇴하고 집에 가."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나 단순한데 뭐가 그렇게 힘들었니. 수아야.
* 집단이 개인에게 준 역할, 의무, 약속 그 밖의 여러 행동 양식을 융(Carl Gustav Jung)은 '페르소나'라 불렀다. 그것은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인 만큼 '외적 인격'이라 할 수 있다. 외적 인격인 페르소나가 내면의 자기와 너무 불일치하면 사회 적응에 곤란을 겪을 수 있다.
* 참고문헌
최은영 , (2018), 내게 무해한 사람-손길, 문학동네.
노안영, 강영신, (2016), 성격심리학, 학지사.
이부영, (2011), 분석심리학(C. G. 융의 인간심성론), 일조각.
* 그림: Alphonse Maria Mucha, <The Flowers> 중 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