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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콰드로페니아 Jul 29. 2022

한여름의 달리기와 한 잔의 버드와이저

호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하루키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 42km를 뛴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있다.

“마라톤 마을의 아침 카페에서 나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찬 암스텔 비어를 마신다. 맥주는 물론 맛있다. 그러나 현실의 맥주는 달리면서 절실하게 상상했던 맥주만큼 맛있지는 않다. (p.103)”

달리기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키처럼 달리기를 마치고 맥주를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한참 뛰고 나면 내 몸의 모든 수분이 날아가버릴 듯한 강한 갈증이 찾아 온다. 갈증을 날리기 위해 물이나 이온음료를 찾기 마련이다.


맥주는  그 순간에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건강해지기 위해서 하는 운동인데 마치고 술을 마신다니 영 이상하다. 9년 넘게 달리기를 즐겼지만 달리기를 마치고 단 한 번도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키의 이야기가 멋있으면서도 신기했다. 달리기를 마치고 마시는 맥주의 맛을 대체 어떨까? 언젠가 한 번쯤은 달리기를 마치고 맥주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년  여름이었다. (요즘 안 더운 여름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 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여름을 좋아해서 웬만한 더위는 용서할 수 있는  나 역시도 찌는 듯한 폭염과 피부를 다 태울 기세로 이글거리는 햇빛은 도저히 견딜 도리가 없었다. 건강을 위해서 달리기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하였다. 한낮에 뛰었다가는 열사병으로 쓰러져 버렸을지 모른다.


당시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한 가지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 꼭 10km를 완주하겠다는 목표였다. 그 정도 체력은 갖추어야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가도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뒤쳐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한 주에 다섯 번 이상, 장거리 달리기와 인터벌을 섞으며 체계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그때 내 몸 상태는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30분을 넘겨도 딱히 힘든 기색이 없었다. 10km를 채우는 일만 내게 남아 있었다.


토요일이었다. 점심에 친구와의 약속을 앞두고 있었다. 주말이라 늦게 일어날 법도 한데 그날은 약속 때문인지 일찍 일어났다. 오늘이 10km를  뛰기에 알맞은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날씨가 좋았고 내 기분도 아주 좋았다는 정도? 운동을 마치고 씻은 후 약속 장소로 가는 계획을 세웠다.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달리는 내 모습은 마라톤 선수 같지 않을까 상상하며 운동화 끈을 묶었다.


아차! 훤한 날씨에 뛰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9시쯤 밖으로 나온 나는 뛰면서 점차 기온이 높아지고 있음을 느꼈다(지금 찾아 보니 그날 최고 기온은 27도였다). 30분까지는 견딜 만했지만 40분이 지나면서 더위와 갈증이 나를 조금씩 조여왔다. 헐떡이며  내뱉는 숨에는 뜨거운 열기가 묻어 나왔다. 흐르는 땀에는 짠맛이 났다. 모래주머니를 찬 듯이 무거워진 두 발을 억지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었다. 극한의 싸움이었다.57분.  9.02km. 10km는 채울 수 없었다. 채우려고 애를 쓰다가는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판에 이르러 내 몸은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목표는 채우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막 달리기를 마쳤을 때는 너무 힘들어서 아쉬움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빨리 이 더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아무래도 무더위에 러닝을 하며 탈수 증세가 온 것 같았다. 꾹 눈을 감고 약속  장소까지만 제때에 도착하자며 버텼다. 도착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식당에 도착하여 메뉴판을 확인하였을 때 무언가 내 눈에 들어 왔다.


버드와이저……!


그 순간 하루키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지금이야말로 하루키처럼 맥주를 마실 때라는 직감이 들었다. 리조또도, 파스타도, 피자도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 잔의 버드와이저를 빨리 마시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주문한 버드와이저가 차가운 잔에 담기고 한 모금 쭉 들이킨 순간,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맥주에서 씁쓸한 맛이 다가오고 그 뒤로 강한 탄산이 뒤이어 찾아 왔다. 시원한 목넘김까지. 캬~! 절로 소리가 나왔다. 


누가 맥주에 마법이라도 타 놓은 것일까?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마시고 나니 이상하게도 현기증이 싹 사라졌다. 하루키는 마라톤까지 그 먼 거리를 달리며 이런 맥주를 그리고 있었구나. 그날 버드와이저를 마시며 하루키가 ‘절실하게 상상했던 맥주’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기대보다 맛있지 않았던 맥주에 실망한 그와 달리 나는 버드와이저를 마시며 너무나 행복했다. 


그 이후로 뙤약볕에 1시간 넘게 뛰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날씨에 또 뛰었다가는 다음 번에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마치고 맥주를 마신 적도 없다. 맥주는 여전히 달리기와 가까이 하기에는 어색하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편의점에서 산 맥주를 마시며 걸어가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다 뛰고 나면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보다 지친 나를 누가 나를 집에 데려다줬으면 하는 바람이 더 절실하다. 
 
그래도 컨디션이 나빠서 한 걸음 한 걸음 더디게 딛는 날이면 그날의 버드와이저를 떠올린다. 그날의 시원한 목 넘김, 눈 녹듯 사르르 사라지던 피로. 그러면 무거웠던 발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노련한 주자처럼 능숙하게 장거리 달리기를 마무리하고 깨끗한 흰 티셔츠를 입은 채로 맥주 한 잔을 들이키는 나의 모습. 언젠가 나도 하루키처럼 마라톤을 마친 후 멋있게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실 수 있을까? 그날은 아직 너무도 먼 미래처럼 아득하지만 내 인생에서 한 번쯤은 찾아 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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