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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매일 단상

글 쓰는 게 재밌다니요

글 못 쓰는 이의 부끄러운 고백

by 김나물

나는 글을 못 쓴다. 특히 이야기 글은 더 그러하다. 글이란 건 재능의 영역이라 생각했고, 이야기 글로 뭔가 해보려 할 때마다 잘 된 적이 없다. 뭘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늘 막막했고. 나왔던 이야기는 항상 뻔했다.


아마도 최초로 이야기 글을 재밌게 썼던 건 대학교 졸작 시나리오를 쓸 때였던 듯하다. 학과 내 아웃사이더로 늘 그렇듯 주변을 맴돌며 지내다가, 졸업을 앞두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까짓 거 될 대로 돼라'하는 심정으로 졸업 요건에도 맞지 않는 작품을 만들겠다며 시나리오를 썼다. 참고로 이 때는 객기가 하늘을 찌르던 때다. 학교 가는 지하철 안에서 혼자 키득키득거리며 글을 썼더랬지. 그것이 내 삶에서 최초로 즐겁게 이야기 글을 썼던 기억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것이니 만큼 수려한 문장을 쓸 필요도 없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대로 옮기면 되겠다 싶었다. 운 좋게도 졸작으로 나는 나름의 큰 상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지 않는가. 준비되지 않은 자의 영광은 길지 않았다.


그즈음 갑작스럽게 일신 상의 큰 변화를 겪게 되었고, 한참의 시간을 돌고 돌아 나는 다시 글을 쓰고 있다. 그나마 가장 잘 아는 시나리오 장편 쓰기에 도전 중이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장편 하나 써본 적도 없고, 그 언저리에 항상 머물러 있었지만 제대로 된 작법을 배운 적도 없지만.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마침, 창작에 대한 목마름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 글을 쓰고 싶구나. 창작을 하고 싶구나. 내가.


올 초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법 수업을 들으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이 들어 소설 쓰겠다는 어느 분의 말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헛살지는 않은 듯하다. 그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사연들이 어떻게든 데이터베이스로 쌓인 듯하다.


무엇보다 세상사가 재밌어졌다. 욕지거리하며 분노를 쏟아내던 어느 20대 허세 있던 여자의 말도. 후려치기 하는 친구의 말도. 매번 질리도록 같은 말만 하는 동네 할머니들의 수다도. 인사 안 하는 버릇없는 후배를 혼내주겠다는 어느 일진 고등학생들의 수다도. 세상천지가 이야깃거리로 가득하구나.


글의 완성도를 떠나 나는 지금 신이 나서 글을 쓰는 중이다. 분홍신을 신은 듯 키보드 위에서 멈추지 못하는 내 손을 말려 달라고 딸에게 외치기도 하고, 캐릭터가 말을 걸어올 때면 황급히 폰을 켜고 메모를 했다. 당장 끝내야 할 논문을 앞두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나를 보며 '미쳤지, 미쳤지'를 연발하는 중이다. 누가 알아주던 어떻든... 나의 이야기가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고 살아 숨 쉬는 것. 그것만으로도 다 한 듯 뿌듯하다. 그러면 됐다.


그나저나 논문은 언제 쓰냐... 잠시 분홍신에서 내려와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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