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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다 Nov 20. 2024

그러니까 그런 일 하며 사는 거야

불법적인 일과 비도덕적인 일을 제외하고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다만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연봉의 차이는 있어서 종종 어떤 사람들은 연봉을 기준으로 귀함과 천함을 나누기도 하는데, 나는 그런 기준을 가진 사람을 천하게 여긴다. 그리고 어떤 직업군이 화이트컬러의 복장을 갖춰 입지 않고, 몸을 쓰는 일을 한다고 해서 천하게 여기는 사람 역시 천하게 여긴다.


나의 본업은 카페직원이다. 보통 ‘바리스타’라고 하는데, 나는 내 직업을 바리스타가 아닌 ‘카페직원’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 이유는 처음 카페에 입사했을 때는 바리스타였지만, 지금은 내업무가 바리스타의 업무에 국한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은 기획자였다가 또 때가 되면 디자이너였다가 오전엔 생산직이었다가 종종 퇴근 후 다른 지점에 시찰 겸 나가는 슈퍼바이저가 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내가 우리 카페의 핵심인물로서 꽤나 쏠쏠한 급여를 받는 거 아닌가 할지도 모르지만, 급여는 디자이너의 급여도 아니고, 슈퍼바이저의 급여도 아닌 처음 입사했을 때의 역할인 일반 바리스타의 급여로 받는다. 근무조건과 출퇴근 시간 역시 모두 바리스타에 맞춰져 있다. 처음엔 모든 일들을 그냥 내 업무라고 생각하고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급여를 주고 더 다양하게 써먹고자 하는 심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가 그들(고용주)에게 내 생각만큼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점차 느꼈다고 표현하는 게 맞으려나. 


종종 그들(고용주)은 내게 주변에 새로운 카페가 생기면 함께 가보기를 권한다. 시장조사와 같은 개념이다. 나는 주로 커피의 맛이나 퀄리티를 자세히 보는 편이고, 고용주는 서비스마인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함께 방문한 후 각자의 소감을 나눠보곤 한다. 언젠가 한번 요즘 인기가 많다는 카페를 같이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 직원의 서비스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게는 딱히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불친절하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나의 고용주에겐 꽤나 불편하게 다가온 듯했다. 한참을 내게 불친절한 그 직원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런 일 하며 사는 거야. 평생 그렇게 살라고 해.”


그 말에 나는 피고용인으로서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의 고용주가 자신의 직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아무리 기분이 안 좋기로서니 나 역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인데, 내 앞에서 ‘그런 일’이라고 말하며 직업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다니.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급하게 퀵서비스를 불러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요금을 두고 퀵서비스 기사와 나의 고용주 사이에 오해가 생겨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짧은 실랑이 끝에 퀵서비스 기사는 자신이 그냥 요금을 덜 받겠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장님. 저 3천 원 더 안 번다고 먹고사는데 지장 없습니다.”


먼발치에서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던 내게 그 말이 다가와 꽂혔다. 왜 그랬을까? 왜 그 말이 그렇게나 깊게 다가온 걸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퀵서비스 기사의 오래된 울분 같은 게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통쾌했다. 어쩌면 내가 내 입 밖으로 꺼내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월급 주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예의와 의전을 그리도 원하면서도 월급 주는 날만 되면 세상 힘들고, 가난하고, 가게운영의 어려움을 토해내며 울상을 짓는 지겨운 반복에 진절머리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고 기본임금이 올라서 월급을 올려줘야 할 때면 고작 5만 원 올려주면서도 감사의 표현을 5만 원어치 이상으로 해주길 바라는 눈빛도 참 부담스럽다. 그런데 그마저도 세금은 적게 내고 싶어서 5만 원은 따로 입금해 주는데, 또 그걸 항상 까먹어서 매번 내 입으로 ‘5만 원 더 주셔야 해요’라고 말하게 한다. 나도 아마 ‘사장님. 저 5만 원 더 안 벌어도 먹고 살만 합니다. 까짓 거 5만 원 그냥 가지세요.’ 하고 싶어서 퀵서비스 기사의 그 말이 내 마음에 꽂힌 지도. 그래도 나는 악착같이 5만 원을 받아내곤 한다. 누구 좋으라고?

퀵서비스 기사가 그 말을 남긴 후 홀연히 사라지자 내 고용주는 얼굴이 벌게져서 “내가 왜 저런 것한테 교육을 받아야 돼!” 하고 소리를 빽 지르고는 가게밖을 뛰쳐나갔다. 만약 그 사람이 퀵서비스 기사가 아니라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저런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 3천 원 아끼려다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들었으니 가성비 좋은 교육을 받은 건 맞지 않나. 


이런 계기가 있을 때마다 나도 나를 돌아보곤 한다. 나 역시 직업적인 무시의 발언을 한 적은 없었는지, 어쭙잖은 배려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었는지, 나를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를 끌어내려 망신을 주려하진 않았는지.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내 고용주 역시 완벽한 사람은 아니기에 그들도 어떤 계기를 통해 더 이상 그런 발언을 하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행운인 것은 그들보다 내가 더 이른 나이에 그걸 깨닫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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