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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쨌거나 글쓴이 Mar 28. 2016

이름을 되찾기 위한, <귀향>

뒤늦은 평이라 송구하고 죄송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주인공은 치히로에서 센이 된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면 네 이름을 잊지 말라고, 하쿠는 상기시킨다. 일본 애니메이션 '나츠메 우인장'에선 우인장(수첩)에 이름을 적힌 요괴들이 이름을 되찾으러 달려든다. (하필 두 예시가 다 일본산이다...) 두 애니메이션은 이름에 관한 과거 동아시아 문화권의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전에는 이름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이라고. 어떤 교양 강의에서 들은 것 중, 아직도 기억나는 부분이다.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다. 그리고 이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는다.


 

 그런 이름을 잃는다는 것. 영화 귀향을 뒤늦게 봤다.(그래서 쓰면서도 부끄럽다) 영화를 두고 오갔던 여러 말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으나 굳이 덧붙일 말은 차치하려 한다.


 개중에는 여린 군인도 있었다. 여동생과 엇비슷한, 자기 또래인 여자아이를 보고 정욕을 풀 만큼 아직은 개가 되지 않은 소년이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물어봐준 사람은 처음이었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사코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전쟁터 한복판 위안소에서 내가 거창에서 온 14살 정민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힘이 없는 나라에 살던 여성들은 끌어내면 끌려나가야 하는 위안부로 여기저기에서 살아야했다. 이름을 잃고 살았고 죽어서도 숫자로, 그것도 어렴풋이 추정된 숫자로 남았다.


 그런데 다시 제자리를 잡은 내 나라에서도 아직 이들의 이름 찾기는 끝나지 않은 것 같다. 나라가 힘이 없기에 이름을 잃었지만, 나라가 힘을 되찾았다고 이름도 절로 되찾는 것은 아니었다.


 모리치오 비롤리의 책 '공화주의'에 따르면,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힘은 해당 공동체의 역사와 그를 계승하겠다는 공통의 관념에서 비롯된다. 책에서 애국심이자 시민의식으로 표현되는 그것은 바로 그렇게 자란다. 시민들은 공통의 과거를 기억하고, 되새기고, 감정을 함께 공유한다. 교육으로든 영화로든, 혹은 그 무엇으로든 끊임없이 희생자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이름을 돈으로만 찾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7만 3164명의 후원자, 그리고 연출진과 배우, 스텝이 땀흘렸던 총 14년의 시간. 영화의 완성도나 CG등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느꼈던 건 이 때문이다. 정말 '감히' 내가 뭐라고 말을 얹을까. 이제는 할머니가 된 위안부 여성들의 이름을 되찾아주려, 개봉까지 말 그대로 치열했던 그 노력에. 다만 한 소년이 이름을 물어봐준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개인에게서 답을 구할 수 밖에 없는지 긴 생각이 스쳤다. 감독의 십여년의 집념을 다른 개인이 아닌 국가가 나눠 짊어질수는 없었을까, 나라가 제법 부강해졌다는 오늘날에. 개개인의 희생에, 응원에 이토록 지나칠 정도로 기반하지 못했다면, 이 영화는 정녕 개봉되지 못하고 사장되었을까. 14년이라는 세월이 어렴풋이 답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아니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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