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쓴 게 이런 칙칙한 단상이라니
죽음에 대해 이야기가 나올 때면 몸서리를 쳤다. 얄팍하게 접해놓고도 감히 실존주의를 참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모순적이게도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대자적 노력'과 거리가 멀다. 시지프스는 개뿔. 치열하게 밀어올려야할 돌에, 실은 거의 집착했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야, 나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에 있을거야."하는 우스갯소리를 덧붙이기까지 한 걸 생각하면, 실존주의를 입에 올릴 자격이 충분히 없지 싶다.
쿵쿵 심장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밤이 있었다. 나는 살아있었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곧 언젠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전 '사례'들을 보아 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하는 찰나의 존재였다. 그러나 내 사고, 느낌, 감각, 기분은 사라져서는 안됐다. 어스름한 새벽을 보는 쓸쓸한 감각까지 느끼지 못하게 되는 일. 상상만으로 절망적이었다.
그런 날이면 다음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보려는 나름의 시위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밤이 오면, 무너져내렸다. 필사적인 사투에도 심장이 뛰는 소리는 여전히 매우 잘 들렸으므로. 밤마다 그렇게 몸서리쳤고, 몇년이 지난 요즘도 가끔 그랬다. 이야기가 나오거나, 홀로 잠이 들 때 종종. 기껏 까먹고 있었는데, 하면서. 하다못해 스치는 공기까지도, 무엇이든 느끼는 것을 놓을 수 없어 나는 이 집착을 버리지 못하리라 싶었다. 자연의 섭리에 수긍하는 어른들의 태도를, 나는 결코 갖지 못하리라고.
그런데 오늘, 감히 가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생각했다. 그토록 집착하던 것을 포기할 수도 있겠다고. 새벽도, 공기도, 그 작은 것들조차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게 편할 수 있겠다고. 자신을 이유로 살아가는 것에서 고립을 느낄 때, 정말 나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닿을 곳이 아무데도 없을 때. 삶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일은 여유나 연륜이 아닌, 그 무엇이 잘근잘근 사람을 짓눌러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은 하나씩 포기하게 되는, 그리고 그렇게 얻게 되는 것.
여전히 실존주의를 말할 자격은 없다. 시지프스는 개뿔. 돌에 깔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