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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래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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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구 Mar 13. 2022

예쁜 집 말고 진짜 집 이야기

<그래도, 삶>을 시작하며

   나의 자취 생활은 학교 정문 앞 고시원에서 시작됐다. 창문이 없으면 30만 원, 있으면 35만 원인 1.5평짜리 방. 침대, 책상, 냉장고의 단출한 살림만 갖춘 그 방에서 나는 나름 잘 지냈다. 그곳엔 부모님 댁에서는 누릴 수 없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지낸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친한 친구가 같은 층에 방을 얻었다. 창문은 없지만 좀 더 넓은 방이었다. 친구와 나는 물건을 나눠 썼다. 샴푸나 세탁 세제 같이 부피 큰 생필품들을 놓을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샴푸는 내 방에, 세제는 친구 방에 놓으면 알맞았다. 그곳엔 책 둘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은 되도록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가끔 빌린 책을 집에 가져오는 것도 부담스러운 날이면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박혀 책을 읽다 귀가했다. 어쩌다 너무 갖고 싶은 책이 생기면 침대 아래 비닐을 깔고 그 위에 올려두었다. 


   작은 방에 살다 보면 많은 욕구들을 유예하게 된다. 요리하고 싶은 욕구, 친구를 초대하고 싶은 욕구, 책을 쌓아놓고 싶은 욕구, 쓸모없고 내 눈에만 예뻐 보이는 물건을 사고 싶은 욕구. 이 방에서 유예된 욕구들은 졸업한 다음으로, 취직한 다음으로, 방이 두 개 딸린 집으로 이사한 다음으로.. 이다음의 다음의 다음들로 미뤄졌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때 꿈꾸던 다음의 다음의 다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때 미뤄둔 욕구들을 열 평 남짓한 방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욕구는 필요와 취향이라는 이름을 달고 물건으로 구체화됐다. 나는 더 이상 침대 밑 얕고 습한 공간에 책을 밀어 넣지 않는다. 냉장고 맞은편 곰팡이 핀 벽지 앞에 효율적으로 물건을 진열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하는 일도 이젠 없다. 필요한 물건 말고 갖고 싶은 물건도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물건은 '필요'라는 이름 외에 너무 많은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유행이라서, 누가 좋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산 물건이라고 해서, 내가 갖고 있는 물건과 비슷한 색상 또는 모양이라서, 그것도 아니면 기뻐서 또는 슬퍼서. 그렇게 하나둘 사모으다 보니 내 자리보다 물건의 자리가 더 많아졌고, 나는 물건 없이는 내 취향과 감정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소비로 그칠 줄 알았던 나의 욕구 해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들을 집에 가둬두기 시작한 것이다. 물건들은 욕구가 아닌 '기억'과 '감정'으로 변모했고, 점차 본래 가진 무게보다 더욱 묵직해져 갔다. 나는 나와 한 번 관계를 맺은 물건들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물건을 버리는 일은 그때의 나를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비 없이는 내 욕구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실현할 수 없는 걸까? 나는 소비 이외에 무엇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 물건들을 쌓아 올리게 된 걸까? 나는 언제 물건들을 떠나보낼 수 있게 될까?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기획한 프로젝트가 바로 <그래도, 삶>이다. 우리는 먼저 각자가 껴안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이 우리의 어떤 욕구와 감정에 닿아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끼리 써 본 집과 물건에 대한 글들


   이 프로젝트는 동료 호수몽과 함께 기획했다. 미니멀리즘과 멋진 인테리어가 각광받는 요즘,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모습을 공개하는 일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아직도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호수몽과 함께 할 수 있어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내가 호수몽을 보며 용기를 냈듯 누군가 우리의 글을 읽고 자신의 진짜 욕구와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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