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낙엽이 예쁘게 떨어지던 날씨였는데. 아파트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팔짱을 끼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자연은 이렇게 하루 만에도 계절을 바꿔치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중이다. 우리 큰딸이 태어났을 때처럼, 세상은 때론 예고 없이 찾아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침대 옆 테이블에 E=mc² 책이 놓여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정식이라고들 한다. 에너지는 질량과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것과 같다- 이 단순한 수식이 세상을 바꿨다고.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자꾸 잠이 든다. 마치 스무 살 때 공대 강의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무 살, 나는 공대생이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다고 하면 웃기려나. 국문과에 가고 싶다는 내 말에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문학으로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래서 선택한 전자공학과. 그때는 몰랐다. 내가 얼마나 문과적인 사람인지를. 숫자보다는 글자가 좋고, 실험보다는 상상이 좋은 사람인 줄을.
지금도 가끔 그 시절 꿈을 꾼다. 시험 전날 밤새워 공부해도 이해되지 않던 미적분. 회로도는 마치 외계어처럼 낯설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나는 몰래 시를 썼다. 실험 리포트 뒷장에, 강의 노트 구석구석에. 수식 대신 은유로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 사실 암기로 프로그램 시험을 쳤던기억이 지나간다. 재미도 없었고 흥미도 없었으며 오로지...졸업장만 ...
밤마다 침댕에 누워 태블릿을 켠다. 오늘은 꼭 한 장이라도 더 읽으리라 다짐하면서. 하지만 어김없이 눈이 감긴다. 방정식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왜 그토록 대단한 발견인지, 도무지 궁금하지 않다. 마흔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스무 살의 마음을 품고 있다.
사실 나는 다른 것이 궁금하다.
어제의 따뜻한 바람이 어떻게 오늘은 이토록 차가워졌는지
낙엽은 어떤 마음으로 붉게 물들어가는지
가을이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은 언제인지
시간은 왜 자꾸만 흘러가는지
요즘은 나의 몸이 왜 자꾸 이렇게 아픈지..나이가 들어간다는것은?
퇴근길에 만난 단풍은 그 어떤 방정식보다도 아름답다.
지인들과 함께 한 바닷가 인근 카페에서 바라본 바다가 아름답다.
그 어떤 물리 법칙보다도 깊은 진실이 담겨있다.
매일 아침 마시는 커피 향에는
그 어떤 화학식보다도 진한 위로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또 이 책을 펼친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치 갑자기 찾아온 겨울바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차가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딸아이의 성장을 모든 순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신비로움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오늘 밤에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방정식을 읽지 못한 채 잠이 들 것이다.
괜찮다.
어쩌면 나에게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그저 바라보는 시간도 필요한지도 모른다.
꼭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잠들기 전
창밖을 보니 달이 밝다.
달도 아마 E=mc²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오늘 밤만큼은
그저 달빛이 예쁘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무 살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공식을 잘 못 외워도
시를 더 사랑해도
괜찮다고.
그게 바로 너라고.
이제는 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꼭 방정식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속에
더 큰 경이로움이 숨어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