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참 묘한 해였다.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삶이 나를 여러 방향으로 흔들었다. 그동안 느낀 스트레스만 합쳐도 지구 한 바퀴는 돌고 남을 정도였다. 마음은 짓눌렸고, 몸은 정신의 짐을 감당하느라 지쳐 있었다. 이 피폐한 시간들이 드디어 저물어간다고 느끼던 어느 날, 나는 새로운 단어 하나를 맞닥뜨렸다.
‘계엄령.’
누가 알았을까? 그 단어가 내 일상에 등장할 줄은.
그날은 지인들과 연극을 한편보고 매섭게 추위가 몰아치던 저녁이었다. 지인들과 동네 오뎅바에 모여 뜨끈한 오뎅국물에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 손끝은 얼었지만,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온기를 품고 있었다. 우리가 천천히 오뎅을 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남편의 이름이 떠 있었다.
“지금 뉴스 봤어?”
“뭐? 무슨 뉴스?”
“속보야. 계엄령 이야기가 나왔어.”
계엄령?
나는 국물을 떠올리다 멈춘 손을 내려놓았다. 머릿속에는 커다란 물음표가 떠다녔다.
뭐라고? 계엄령? 이게 지금 무슨 시대의 말인가?
군사 정권, 철조망, 탱크. 먼지 낀 역사책에서만 보던 단어가 현실에서 들려왔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비현실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뉴스 속 스크롤바에 빨간 글씨로 “속보”가 뜨는 장면이 그려지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상반된 두 소식을 떠올렸다.
하나는 불편하고, 하나는 기뻤다.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문화적 영웅, 한국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던 이야기였다. 한강 작가의 이름이 문학의 전당에 새겨졌다는 소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엄령이라는 단어였다.
두 세계가 교차했다. 한쪽은 빛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어두운 회색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뎅 국물의 김이 희미해지는지도 모른 채.
그날 이후로 나는 자꾸만 같은 생각을 한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세상을 보고 있으니, 진짜 오래 살길 잘했다.
정치가 망하는 나라를 문학이 살리고 있다.
살아있는 역사의 순간에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