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4년 전부터 머리를 쭉 길러오고 있는 남자다. 14년 전에는 주변에 머리가 긴 남자들이 없어서, 머리 긴 남자로 살아가는 게 정말 쉽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힐끔힐끔 쳐다보고, 화장실이나 목욕탕을 갈 때 깜짝 놀라는 사람도 종종 있었고...... 지금은 그래도 어느 정도 머리 긴 남자들이 매스컴에도 등장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머리 긴 남자를 존중해주는 분위기로 나아가면서 과거에 비해서는 눈치를 덜 보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14년간 버티고 힘겹게 머리를 길러온 이유가 뭘까?(이유는 본문 후반부에서 함께 밝힌다)
그리고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 대부분은 분홍색 옷을 입는다. 분홍색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마젠타라고 불리는 선명한 핫핑크색을 입는다. 그렇게 입는 의도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에 띄는 색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나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분홍색이 따뜻하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색이라 어린아이들에게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의도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색깔에 대한 편견, 나아가 세상의 모든 불필요한 편견들을 허물어주기 위함이다.
지금은 색깔에 성별이 어딨냐 하며 남자들도 분홍색을 거리낌 없이 선택하는 분위기가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분홍색은 흔히 여성스러운 색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근데 불과 1~2세기 전까지만 해도 분홍색을 포함한 붉은색 계열의 색은 강렬한 느낌, 뜨겁고 열정적인 느낌으로 남성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오히려 푸른색 계열의 색이 아기자기하고 차분한 느낌으로 여성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과거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붉은색은 양(陽), 푸른색은 음(陰)이라 하여 남자는 붉은색, 여자는 푸른색으로 상징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물론 옛날에 그랬다고 분홍색은 원래 남자들의 색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색깔에 성별이 어딨을까? 남자색 여자색 이런 게 어딨을까? 다 의미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런 껍데기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계속 달라져 왔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문화를 바꿔 나가야 한다. 성별이나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색깔을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에 대해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미지 출처 : 스브스 뉴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 요즘 "남자는 분홍색 쓰면 안 돼" 하고 가르치는 부모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왜 남자아이들은 분홍색을 기피하거나 분홍색은 여자들이 쓰는 색이라고 여길까? 밖에 나가면 다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분홍색 옷을 입거나 분홍색 소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여자들이고, 여자화장실 표지판이나 여성전용 주차장 및 임산부 배려석 등의 여성전용 시설물이 거의 분홍색으로 표시되어 있고, 장난감을 사러 마트나 완구점에 가면 여자아이 장난감 코너에는 대부분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면 또래 여자아이들의 대부분은 분홍색 옷과 분홍색 소품으로 치장하고 있고......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분홍색은 여자들의 색이에요" 하고 보여주고 있으니,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들, 밖에 나가면 보이는 세상이 대부분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아이들은 그걸 보고 분홍색은 여자색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내 조카는 5살 때까지 분홍색을 좋아하는 남자아이였으나, 어린이집에 가서 친구들이 왜 남자가 분홍색을 쓰냐는 얘기를 듣고 그다음부터는 분홍색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치우쳐진 문화로 인해 아이들이 분홍색은 여자들의 색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며 균형을 맞춰나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남자아이들에게 남자들이 분홍색 옷을 입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줘야 한다. 남자아이들에게 머리가 긴 남자들을 더 많이 보여줘야 한다. 가정에서라도,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라도, 우리가 소속된 작은 공동체에서라도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고, 그래야 아이들이 '남자가 머리가 긴 것', '남자가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이 유별난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아이들이 선택을 할 때 오롯이 자기의 의지와 취향으로 선택을 할 수 있다. 남자니까 혹은 여자니까 하며 자기가 원하는 걸 선택하길 주저하거나, 자기가 원치 않는 걸 등 떠밀려 마지못해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사라질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균형 맞추기
취향이라는 것도 내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범위 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 손에 이끌려 억지로 머리를 잘려서 평생짧은 머리만 해 욌던 남자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긴 머리를 하고 싶다고 당장 머리를 기를 수 있을까? 아마도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쉽사리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울 것이고, '긴 머리는 원래 내 취향이 아니야' 하고 여기며 대부분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어린 시절에 남자가 분홍색을 좋아한다고 놀림받는 모습을 보고 자란 남자아이가 분홍색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은 극히 낮을 것이다. 이렇듯 암묵적인 사회의 편견으로 인해 등 떠밀려 선택하게 된 취향이 순수한 자기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만들어진 취향은 개인의 의지로 만들어진 취향이 아닌 사회가 만든 취향일 뿐이다.
한 남자아이가 의사보다는 간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병원에서 평생 여자 간호사만 보고 자라 왔다면 이 남자아이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주저하게 될 것이다. 주저하지 않더라도 엄청난 도전과 모험이라 여기고 전전긍긍하며 간호사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병원에 갔을 때 남자 간호사도 흔히 보고 자랐던 남자아이는 자기가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크게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남자아이들 중에 머리가 긴 남자아이가 절반 이상은 되어야, 아이가 머리 길이나 머리 스타일을 온전히 자기의 의지와 취향으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치우쳐진 문화 속에서 등 떠밀려 마지못해 특정 취향을 요구받고, 그것이 마치 자기의 취향인 양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만드는 이 사회는 꼭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의 성별을 손쉽게 구분 짓기 위해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가장 큰 두 가지 상징물인 분홍색과 긴 머리를 내가 직접 몸소 보여주며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는 것이다. 지금 나와 만나는 아이들은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남자가 머리가 긴 것, 분홍색 옷을 입는 것이 유별난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생활 속에서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나아가 아이들은 '내가 성별이나 나이, 인종, 기질 등등 때문에 선택하지 못할 것은 없다' 여기며 온전히 자기의 의지대로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자라나서 사회를 이끌어나갈 나이가 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좀 더 자유롭고 포용적인 세상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그것이 내가 분홍색 옷을 입고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근본적인 이유다.
p.s.
지난주에 우리 교실에 있는 머리가 긴 남자아이 J가 친구들과 놀다가 한 아이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너 여잔줄 알았잖아!"
그래서 나는 그 말을 한 아이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그렇게 느낄 수 있어. 하지만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하는 게 예의란다."
그러자 J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얘기 들어도 기분 안 나빠요. 웃겨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성숙하지 못한 거잖아요!"
이 얘기를 들으니 얘가 나보다 낫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른이 돼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따가운 말에 크게 동요하고 마음 졸이고 그랬는데,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그런 얘길 들어도 당당하고 뭐가 중요한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