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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Nov 10. 2024

사회적 고통을 통제해온 잔혹한 메커니즘의 틈새

연극 〈비명자들 3막: 나무가 있다〉



  고통은 편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개별적이고 특수하다. 편재하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다. 가끔 비슷한 결을 가진 고통끼리 공명하여 증폭되면 그 아픔이 사회의 것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쉬이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도 옆에서 위로해줄 수 있을 뿐 내 고통을 직접 겪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통의 전달 불가능성은 〈비명자들 3막: 나무가 있다〉의 출발점이다. 전 세계에 비명자들이 속출한 지 한참이다. 비명자는 내내 기이한 소리를 질러대는 존재로 그들의 비명은 근방 4킬로미터 이내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다. 인간이 비명자와 접촉하면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린다. 더불어 만약 비명자에게 물리적으로 고통을 가하면 근방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고통을 똑같이 느낀다.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좀비를 닮았으나 어찌되었든 고통으로 인간 사회와 ‘연결’되어 있긴 한 존재가 바로 비명자다.   

  

  비명자로 초토화된 세계, 한국 정부는 그들을 수용소에 모아두고 근방을 경계하며 비명자를 관리한다. 그들이 야기할지도 모르는 ‘고통의 확산’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점차 여러 한계에 이른다. 그래서 이들을 DMZ로 옮기자는 계획을 세운다. 여러 이점이 있다.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민간인이 ‘피해’를 입을 일이 없다.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비명자 문제를 ‘해결’할 실험을 진행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비명자의 ‘능력’을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떠 있기도 하다.     


  극은 비명자를 문젯거리, 괴물, 실험대상, 도구로 간주하는 사람들과 비명자의 고통에 접속해 연결점을 복원하고 소통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갈등과 긴장을 밑절미 삼아 전개된다. ‘갈등’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비명자를 이해하고 그들을 인격체로 존중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이 문제를 인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은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좀비 영화에 늘 나오는 장면이 있다. 가족, 친구, 연인이었으나 지금은 좀비가 된 누군가를 사살하거나 떼어내는 장면.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을 단번에 내게서 끊어내야 한다는 데서 오는 아픔과 나 역시 언제 남들에게 그렇게 버려질 좀비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뒤섞인 장면이다. 비명자는 좀비보다 더한층 복잡하다. 극은 비명자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감각을 버린 자’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한국 전쟁 시기 국군의 양민 학살부터 핼러윈 참사까지, 한국 현대사 굽이굽이에 새겨진 무수한 고통이 비명자들이 생겨난 이유라는 점을 환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명자는 좀비와는 다르다. 좀비가 타자를 감염시키라는 욕망에 지배되는 수동적 존재라면 비명자는 더는 고통스럽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장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능동적 존재다.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주목하지 않는 사회에서 내내 외로워하며 고통에 빠져 지내기보다는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겠다는 선언으로서 비명자의 탄생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비극은 비명자의 적극적 의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소수라는 데 있다. 극에는 과거 비명자의 고통을 연구하던 누군가가 비명자와 인간의 소통 가능성을 발견한 데서 출발해, 집요하게 비명자의 편에 서서 비명자 집단 학살을 반대하는 기자가 나온다. 그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힘주어 잡은 비명자의 손을 놓지 않고, 마침내 비명자와 소통하는 데 성공한다. 비명자가 의식을 말살당한 괴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고통을 거부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 기자 말고는 굳이 고통을 감내하며 비명자의 손을 잡고자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명자를 DMZ에 몰아놓은 참에 한번에 ‘처리’해버리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갈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합리적’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고통은 왜 외로울 수밖에 없는지가 드러난다. 소수의 고통에 공감해 함께 아파하는 것보다는 당사자만 괴로워하는 게 더 낫다는 공리주의적 명제의 확립이다. 우리가 수많은 사회적 참사에서 질리도록 들어온 말이자 고통에 공감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무릎 꿇리는 무기가 되어온 말이다. 고통에 접속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 의지가 만들어낸 치유의 힘은 처연하게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자신이 무너질 수 있음을 각오하고 비명자의 손을 잡는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대다수는 그 아름다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를 말하는 사람을 손가락질한다. 사회적 고통이 통제되어온 메커니즘이다.     



  극단 ‘고래’는 사회적 딜레마를 포착하여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여럿 만들어왔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먼저 대다수의 ‘상식’이 있다. 그다음에는 함께 아파하겠다는 소수만이 마주할 수 있는 고통의 승화가 있다. 대립하는 이들 사이에서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극의 질문에서 쉬이 빠져나올 수 없다. 효율성, 합리성에 굴복해 살아가면서도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미약하나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극 중 기자처럼 불편을 감수하고 기꺼이 타인의 고통에 접속해보겠다는 의지다.     


〈비명자들 3막: 나무가 있다〉는 커다란 스케일에 방대하고 촘촘한 세계관을 더해 결코 쉬이 피어나지 않을 이 의지를 부추긴다. 끝까지 비명자 옆에 선 기자의 집요하고 절박한 태도는 작디작은 가능성의 화신이 되어 합리성과 효율성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무언가의 가능성을 환기한다. 〈비명자들 3막: 나무가 있다〉는 구조적, 체계적으로 고통을 생산하지만 정작 그로 인해 개개인이 겪는 고통을 치유하고 보듬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동시대의 잔혹한 지형을 그려낸다. 나아가 미약하나마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SF적 상상력을 곁들여 집요하게 모색하고, 마침내 표상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역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극단 고래에서 제공받은 티켓으로 연극을 관람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배우들의 연습 사진, 무대 세팅 사진은 극단 고래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GoraeTheatre)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연극 〈비명자들 3막: 나무가 있다〉는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11월 8일~17일까지 공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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