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거대 마피아 조직의 보스 델 몬테는 오랫동안 젠더 디스포리아로 단 한 번도 ‘진짜’ 삶을 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모든 걸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비밀스러운 작업을 시작하고, 그 일을 처리해줄 변호사 리타를 섭외한다. 일은 잘 끝났다. 델 몬테는 상대 조직에게 살해된 것처럼 꾸며졌고, 이제 그의 이름은 에밀리아 페레즈다. 그러나 트랜지션은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일 수 없다. 과거의 삶과 연계되지 않은 현재란 존재할 수 없다. 트랜스젠더뿐 아니라 모든 삶이 마찬가지다. 에밀리아 페레즈에게는 특히 두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그래서 다시 리타를 불러 몰래 떠난 멕시코로 돌아갈 계획을 짠다.
이 독특한 스타일의 뮤지컬 영화에서 영화의 스타일만큼이나 인상적인 건 트랜지션을 더 크고 넓은 맥락으로 확장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의 메시지다. 아이들의 ‘고모’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에밀리아 페레즈는 자신이 과거 마피아 두목이던 시절 무참히 살해한 사람들의 사연을 접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NGO를 설립한다. 자신의 재력과 네트워크를 사용해 만연한 범죄와 폭력으로 실종된 사람들을 유족에게 찾아주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델 몬테의 업보를 에밀리아 페레즈가 대신 청산하는 셈이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 어두운 과거를 책임지려는 것 모두 에밀리아 페레즈를 그녀가 과거 델 몬테일 때 남겨놓은 흔적으로 이끈다. ‘성공’한 트랜지션의 의미가 흔들린다. 그토록 원하던 여성이 되어, 살고 싶은 삶을 살고, 레즈비언 트랜스젠더로서 새로운 행복까지 찾은 에밀리아 페레즈는 끝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과거와 현재의 뒤엉킨 현실 속에서 파멸하고 만다. 생물학적 트랜지션의 완벽한 성공은 과거의 질곡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부산스레 오가며 그로부터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야말로 바로 트랜지션이다.
‘난 여자/남자예요!’라는 선언만으로 모든 게 끝이라는 식의 언설은 트랜스젠더를 비난하는 가장 쉬운 말 중 하나다. 그냥 한 순간의 선언만으로 모든 걸 뒤바꿀 수 있다는 듯, 그들은 트랜스젠더를 조롱한다. 그러나 에밀리아 페레즈가 보여주듯, 트랜지션은 결코 그 선언자의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당사자들은 트랜지션 후에도 끝없이 미로를 헤맨다. 영화의 마지막, 리타를 선두로 한 에밀리아 페레즈 추모 행렬 장면이 내게 트랜지션의 미로를 끝끝내 빠져나오지 못한 자에 관한 집단적 애도이자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기꺼이 뛰어든 어느 트랜스젠더 여성을 성녀로 추앙하는 행위로 읽힌 이유다.
한편, 이 영화가 멕시코를 재현하는 방식 등이 논란이 됐는데, 일견 정당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무수한 한국 영화가 동남아로 범죄를 외주화한 후 타자화하고, 〈청년 경찰〉처럼 자기 영토 내부의 지역을 같은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을 비판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의 경우, 나는 이러한 비판이 영화의 서사를 통해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영화가 멕시코를 범죄의 온상으로 그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다 꼬여버리는 과정까지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멕시코는 그저 영화적 설정을 위한 배경으로만 차용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멕시코는 범죄가 창궐하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트랜스젠더 성녀가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더불어 영화의 제작 및 촬영 과정과 언어의 어색함 등에 대한 지적도 일리는 있지만 근본적인 비판일 수는 없다고 본다. 한국 제작진들로만 이뤄진 팀이 중국을 배경으로 중국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찍는 건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를 소재주의적으로만 활용했는지의 여부, 중국을 무대로 한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는지의 여부뿐이다. 언어의 어색함 역시 마찬가지다. 사투리를 쓰지 않는 배우가 사투리 연기를 할 때마다 반복되는 어색하다는 ‘논란’은 그저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만 논의되어야 할 뿐 영화를 보이콧하는 근거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