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베리테’ 섹션 상영작
한국/2025/99min/DCP/Color/B&W/15
▶학생 운동이 우리에게 남긴 것에 대한 ‘불가능한’ 회고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은 20대를 이명박, 박근혜와 싸우는 학생 운동가로 보낸 감독이 ‘배신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채워진다. ‘배신자’는 먼저 운동판을 떠난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그 뒤로 감독도 운동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안갯속에 빠졌다. 모든 것이 허무했고, 시간 낭비가 아니었을까 싶어서였다. 사회 정의를 위한 운동이 내게는 무엇을 남겼나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어서였다. ‘대의’ 앞에서 감히 나의 행복을 말할 수 없는 운동 문화에 소진되었기 때문이었다. 운동을 그만두고 사회에 나와보니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느낌이 들어서였다.
감독은 20대를 자신과 비슷하게 보낸 친구들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에서 이 혼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영화가 소개하는 투쟁 현장 대부분에 나 역시 있었기 때문에, 즉 감독과 감독 친구들의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이기도 했기에 영화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영화에 나오는 투쟁 현장 자료들의 투박한 화질은 이명박근혜 시기가 이미 한참 먼 과거인 듯한 인상을 주어서 생경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영화가 자신의 흥미로운 물음에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지는 못한 것 같다. 운동 이후의 감정보다는 왜 그들이 활동을 시작했고, 어떤 활동 궤적을 따랐는지에 더 많은 비중이 할애된 느낌이다. 이는 어쩌면 과거 회고와 인터뷰가 영화의 물음을 포착하는 적확한 방법일 수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실패’는 어쩌면 그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내밀한 패배와 열패감의 기분은 ‘학생 운동’이 소멸하고 ‘청년 운동’이 등장한 맥락, 그러니까 이명박근혜와 싸운 사람들이 사회적 재생산에 실패했다는 맥락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그 시절을 통과한 우리가 과거를 객관적으로 회고하기에는 아직도 ‘흔들리는’ 중이기 때문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이지 않을까. 그래서였다. 자신의 질문에 온전하게 답하지 못하는 이 영화의 ‘한계’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고, 그 한계를 다시 한번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운동이 이들에게 남긴 긍정적 ‘유산’이라고 생각한 것은.
'국제경쟁' 상영작
인도, 핀란드, 라트비아/2025/101min/DCP/Color/15
▶영화를 매개한 탈성매매의 여정
CAM-ON은 인도 콜카타의 성노동자와 그들의 자녀들이 만든 영화 제작 단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 어떻게 성노동에 진입하게 되었는지, 성노동자들이 마주한 현실이 어떠한지, 그 가족들의 생활은 어떤지 등을 영화에 담아내는 것이다. 당사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연기한다면 성찰과 객관화의 순간이 도래하기 마련인데, 영화가 보여주듯이 이는 이들이 자신이 힘으로 성매매의 굴레에서 나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낙인에 짓눌렸던 성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퍽퍽한 삶을 견디고 변화를 모색할 원동력을 얻는 것이다.
다만 영화가 굉장히 첨예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낙인찍힌 소수자가 자기 목소리를 낸다’ 이상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한다는 점은 아쉽다. 충분히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소 감상적으로만 흘러가는 느낌이다. 이들이 자리한 세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CAM-ON의 활동에 연대하고 지지하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이 영화가 단순한 기록 이상의 무언가가 되지 못한 데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경쟁' 세션 상영작
한국2025109minDCPColor15
▶무심한 한국의 시공간에 미얀마의 외침이 틈입할 수 있도록
불과 얼마 전에 친위 쿠데타 시도가 있었던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와 연대하는 최진배, 녜인따진 부부의 이야기가 남 일 같지만은 않았다. 최진배는 미얀마에서 만난 아내와 한국에서 식을 올린 뒤 다시 미얀마로 돌아가려 했지만, 팬데믹과 군부 쿠데타의 발발로 그러지 못했다. 부부에게는 매일 미얀마의 끔찍한 소식이 전해온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최진배는 배달 라이더를 하며, 녜인은 식당에서 일하며 번 돈에 모금을 더해 후원 활동을 한다. 최진배는 미얀마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페이스북 그룹 ‘미얀마 투데이’를 운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심한 한국의 시공간에 미얀마의 외침이 틈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두 사람의 활동은 몇몇 어려움을 마주한다. 미얀마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식어가고 있는 게 첫 번째. 두 사람의 불안정한 노동과 국제 부부에 대한 편견이 두 번째. 나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부부의 이야기에 감명받았다. 더불어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국제 뉴스’로만 소비한 걸 반성했다. 그래서 최진배가 쓴 《포가튼 미얀마》를 구매해 읽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실질적 연대의 도구일 수 있다는 점이 더 많은 사람을 통해 증명된다면 좋겠다.
‘베리테’ 섹션 상영작
미국/2024/110min/DCP/Color/15
▶미국 ‘극우’ 활동가 세 명의 일상과 활동의 기록
이른바 미국의 ‘극우’ 활동가 세 명의 일상과 활동을 기록한 이 영화에는 미국에 심리적 내전이 도래했다는 징후가 무수히 널려 있다. 이들 중 누군가는 BLM(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소속 활동가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중국계 아내와 결혼해 곧 출산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극렬한 트럼프 지지와 안티파(Anti-Fascist Action)에 대한 증오 앞에서 ‘사소해진다’. 영화는 이들의 감정과 활동이 서서히 고조되다 2021년의 의회 폭동으로 분출된 후 그들이 마주한 ‘현타’의 시간까지를 담아낸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이들 중 한 명이 (귀스타브 르 봉이 말하는) 군중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점이었다. 의회 폭동에 참여해 훗날 12년 형을 받은 이 남자는 우리 중 5퍼센트만 적극적으로 나서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선동하며, 실제로 자신이 그 역할을 떠맡는다. 이미 열정적인 극우 활동가들이 나타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서부지법 폭동을 주도한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질문하거나 설명하지 않아서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차근히 관찰하며 미국 극우 네트워크와 심리를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는 흥미로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