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등대로》(민음사, 2014)
그래, 물론이지. 내일 날이 맑으면 말이야.
내일 등대에 갈 가능성은 조금도 없소.
이 두 대사에 소설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각각 아들 제임스가 등대에 놀러 가자고 조르자 램지 부인과 램지가 내놓은 대답이다.
램지 부인에게는 내일 날씨가 좋지 않아 등대로 놀러 가기 힘들 거라는 사실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램지 부인은 사실의 세계가 아닌 관계의 세계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녀는 진심 어린 관계에서 우러나는 사랑, 기쁨, 환희, 슬픔, 바람, 우울의 감정을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괴로워한다. 등대에 갈 수 있다고 제임스를 달래는 것이 거짓말은 아닐까 걱정한다. 거짓말이 제임스에게 상처를 남길까 두려워한다. 매 순간 "본능적으로 도와주고 베풀어 주던 것"이 "오로지 자기만족"의 동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회의한다.
램지는 정반대다. 그는 사실의 수호자다. 그는 늘 램지 부인의 "무지와 단순함을 과장해서 생각했다." 램지는 아내가 이성적 사고 능력을 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제임스에게 거짓 약속을 하는 부인이 못마땅하다.
하지만 동시에 열등감을 느낀다. 그는 늘 램지 부인의 공감을 필요로 한다. 램지 부인에게 자신의 재능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램지 부인의 공감이 없다면 그는 "자신의 불모성을 풍요로운 것으로" 바꾸지 못한다. 그는 램지 부인이 그러하듯, 무언가를 창조하지 못하며, 사람과 사물에 생기를 불어넣지 못한다. 그는 아내의 창조를 바라보며 경외와 슬픔을 함께 느낀다.
램지 부인도 자신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녀는 남자들에게 뭔가 부족한 점이 있는 듯이 그들을 늘 동정했고, 여자들은 결코 동정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뭔가를 갖고 있는 듯이".
하지만 램지와 램지 부인이 상징하는 두 세계의 위계는 뒤집어져있다. 결핍을 느끼는 자가 위에 있고, 충만한 자가 아래에 있다. 램지 부인이 "남편보다 더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단 한순간도 자신이 남편보다 더 훌륭하다고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 가운데 그가 무한히 더 중요한 인물이고 그녀가 세상에 준 것은 그가 준 것과 비교해 볼 때 하찮기 그지없음을 사람들이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왜 램지 부인은 힘을 갖고도 약자의 위치를 자처할까? 그녀가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달래주는 데 모든 힘을 써버렸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고, 다 써 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겉껍데기조차 남지 않았다."
부인이 내뿜는 생명의 기운으로 삶을 이어가는 램지는 부인의 기력 소진을 오인하고, 그 오인 위에 자기 존재의 토대를 다진다. 이 어처구니없는 오인에서 파생된 거꾸로 된 위계는 지독히 단단하다. 램지 부인은 말한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내일은 비가 올 거예요." 램지가 승리했고, 램지 부인이 패배했다. 램지의 세계가 승리했고, 램지 부인의 세계가 패배했다. 남성이 승리했고, 여성이 패배했다.
십 년이 흘렀다. 램지 부인은 죽었고, "그 집은 황폐해졌다." 집을 보듬는 램지 부인의 생명력은 사라졌다. 별장 관리인인 맥냅 부인과 베스트 부인이 근근이 "퇴락과 부패를 진압"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램지가 아들 제임스, 딸 캠과 함께 별장으로 돌아온다. 등대로 가기 위해서. 램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지난날 아내와 제임스의 설렘을 부정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저 미안함뿐이다. 뉘우침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권위적이며 위압적이다.
램지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란 "흐리멍덩한 마음"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그 흐리멍덩함을 사랑했음을 추억한다. 그는 여성을 경멸하는 동시에 사랑하지만, 여기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여자란 그런 존재니까. 여자란 멍청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니까. 십 년이 지나, 부인의 죽음을 지나, 등대로 나아가면서도 그는 이 모순을 포기하지 않는다.
캠과 제임스는 그런 아버지를 증오한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폭정에 저항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캠은 자꾸 흔들린다. 아버지 램지를 증오하면서도 그를 안쓰럽게 여긴다. 캠은 끊임없이 "제임스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은밀한 징표를 전할 말"을 고민한다.
제임스는 이내 캠의 배신·이탈을 알아챈다. "캠은 절대로 죽을 때까지 폭정에 저항하지 못할 거야."라고, 제임스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슬프고도 실쭉하고 순종적인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울해졌다."
제임스의 실망은 캠에게도 전해진다. 캠은 마음속으로 반발한다. "너는 이런 압박감과 분열된 감정, 이 특별한 유혹에 노출된 적이 없잖아." 분노마저 젠더화되어 표출되는 현실 앞에서 캠의 마음과 정신은 무한히 분열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캠과 달리, 램지를 향한 제임스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는 칼을 들어 아버지의 심장을 찌르는 해묵은 상징"을 늘 간직해 왔다. 하지만 제임스의 분노는 아버지 램지를 닮아 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결코 자기를 칭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분노는 어머니 세계의 복원이 아닌 아버지 세계의 진입을 향해있다. 그리고 마침내, 제임스는 아버지로부터 "잘했다!"는 칭찬을 듣는다. 캠이 아버지에 대한 모순된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동안, 제임스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한다. 그렇게, 램지 부인이 자신을 가장 닮았다고 여긴 자식 제임스는 아버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남성의 승리와 여성의 패배가 반복된다.
그리고 릴리. 릴리는 삼십 살이 넘었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여자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조롱을 마주한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린다. 그녀는 남들이 보는 세계가 아닌 자신이 보는 세계를 그린다. 릴리는 램지 부인의 완벽한 계승자다. 그녀가 램지 부인을 추억하는 장면에 묻어 있는 감정은 단순한 그리움 그 이상이다. 그녀는 램지 부인을 사랑했고, 동경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고, 동경한다.
릴리는 램지 부인의 완벽한 계승자인 동시에 진화한 계승자다. 램지 부인은 남자들이 릴리의 매력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슬퍼한다. '눈이 중국인처럼 작은 릴리'가 결핍된 삶을 살 것이라 걱정한다(버지니아 울프가 아름다움이 '결핍'된 릴리를 표현하기 위해 인종적 묘사를 활용했다는 게 우습고 슬펐다). 하지만 릴리는 램지 부인의 전망을 비껴간다.
그녀는 '여자의 의무'를 알고 있지만 그 의무와 불화한다. 여자들이 해오던 일을 멈추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며 혼자 웃음 짓는다. 램지 부인의 힘을 예찬한다. 램지 부인을 추억하며 눈물 흘린다. 결혼을 강력히 권유했던 램지 부인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은 그런 삶으로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램지가 아내에게 평생 받기만 했음에 분노한다. 여자는 글을 쓰거나 그릴 수 없다는 텐슬리의 말에 코웃음 친다.
쉽지는 않다. 릴리는 여자의 의무를 거부한 것에 문득문득 죄책감을 느끼며, "두 가지 상반되는 힘" 앞에서 "면도날처럼 예리한 균형"을 이룰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녀는 마침내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녀는 램지 부인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완성했어. 끝났어. 그래, 그녀는 극도의 피로감이 밀려오는 가운데 붓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이제 그것을 보았어."
램지와 램지 부인, 그리고 램지의 세계와 램지 부인의 세계. 이 불균형한 두 세계의 가장 예민한 관찰자였던 릴리는 결국 자신이 본 세계를 캔버스에 담아냈다. 릴리가 캔버스에 담은 그림은 어떤 모습일까?
그녀의 그림은 하인의 침실에 걸리거나 "돌돌 말려서 소파 밑에 처박힐 것"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을 어디에 걸어둘지는 독자의 몫이다. 릴리가 램지 부인의 기대를 벗어남으로써 그녀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듯이, 우리도 릴리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 그녀의 그림을 걸어둠으로써 그녀 그림에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등대로》는 감정, 생각, 의식을 따라 흘러간다. 등대에 놀러 가기로 했으나 날씨가 나빠 가지 못한 가족, 십 년이 흘러 구성원의 일부가 죽은 후 다시 등대를 찾은 가족, 그리고 그들의 관찰자이자 동반자 릴리. 소설의 줄거리는 이게 전부다. 섬세하고 풍부하며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 소설의 나머지 빈칸을 채운다. 나는 '모더니즘', '의식의 흐름' 등의 개념은 잘 모른다. 그냥, 아름답고 슬픈 소설을 이런 방식으로도 쓸 수 있구나, 하며 내내 몰입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더불어 정신질환 재발을 우려하여 자살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 생애가 조금은 이해됐다. 그녀처럼 세상을 감각하는 사람이 '제정신'으로 잘 살아갔다면, 나는 아마 작가의 진정성을 조금은 의심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