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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n 19. 2021

당신이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길

소설 《댈러웨이 부인》, 영화 〈댈러웨이 부인〉,〈디 아워스〉

파티를 준비하는 여자


  조화롭고 화목한 분위기의 파티가 열린다. 맛있는 음식과 음료,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장식이 있다. 참석자 모두가 미소를 띠고 있다. 소외된 사람 없이 웃으며 대화한다.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다. 그리고 파티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파티의 주최자다. 그녀는 파티를 엶으로써 이 모든 걸 창조해냈다. 하지만 그녀는 긴장을 풀지 않는다. 파티가 끝날 때까지 모든 게 완벽해야 한다. 하나라도 틀어지지 않게 끝까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긴장되고 스트레스받는 일이지만 파티가 성공적으로 끝나야 그녀도 행복할 것이기에 참고 넘긴다. 파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파티가 여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공직자 남편을 둔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를 열기로 한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있었던 일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쓴 소설이다. 클라리사는 파티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기에 모든 걸 꼼꼼히 챙긴다. 파티가 성공하면 그녀도 행복할 것이다. 그녀에게 “파티는 하나의 봉헌이었다. 조합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를 위해?” 이 질문은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클라리사의 두 가지 행복


  파티를 준비하며 클라리사는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샐리 시튼은 그녀가 최초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샐리는 여자들끼리 사랑하는 일의 기쁨을 알려주었다. 클라리사는 샐리와 키스를 나눴다. “황홀한 순간”이었다. 멍청한 남자 둘이 눈치 없이 끼어들어 “난데없고, 끔찍”한 감정에 휩싸이기 전까지는. 클라리사는 금세 우울해진다. “무엇인가가 그 행복의 순간을 중단시키고 망쳐 놓으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클라리사는 분명 샐리와의 키스를 황홀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느낌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혼자만 느끼는 행복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행복은 다른 사람들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흐름 속에서만 온전해진다. 내가 아무리 황홀하고 행복해도,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중단하려 들면 행복할 수 없다. “클라리사조차도 더는 아니고 그저 미세스 댈러웨이, 리처드 댈러웨이의 부인으로서” “다분히 엄숙한 행진에 동참”하는 클라리사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걸으면(즉 흐름을 거스르면), 행복은 박탈당한다.


  두 번째 사랑은 피터 월시다. 피터는 생기 넘치는 당돌함으로 클라리사를 매혹했다. 샐리의 말마따나 피터는 “그녀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그녀의 세속적인 면을 부추겨” 클라리사를 “한갓 안주인으로 만들어 버릴 ‘완벽한 신사들'로부터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영화 〈댈러웨이 부인〉스틸컷


  하지만 클라리사는 피터가 아닌 리처드 댈러웨이와 결혼했다. 피터는 충격을 받고 오랜 시간 방황한다. 피터는 모험을 상징하고, 리처드는 흐름(안정)을 상징한다. 샐리와의 황홀한 키스를 도둑맞은 적이 있던 클라리사는 모험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행복을 빼앗기는 대신 남들과 같은 방향을 향해 걷기로 한다. 파티 당일, 오랜만에 피터를 만난 클라리사는 생각한다. “만일 내가 이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이 명랑함이 온종일 내 것이 되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그녀는 자기만 아는 행복 대신 모두가 인정하는 행복을 선택했다.


  물론 클라리사는 ‘행복’하다. 리처드와 결혼해 사랑스러운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고, 모두가 만족하는 성공적인 파티를 여러 번 열었다. 클라리사는 모든 걸 ‘조화’롭게 만드는 일에 일가견이 있다. 그것은 여자의 일이다. 흐름에 동참한 클라리사는 여자의 일을 능숙하게 수행하는 데서 ‘행복’을 느낀다.



이토록 슬픈 교환 그리고 상실


  한편, 소설에는 또 다른 서사가 있다. 주인공은 샙티머스 스미스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그는 동료를 잃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가 느끼는 슬픔은 정신과 전문의에 의해 ‘균형 감각’ 상실이라는 병으로 진단된다. 그가 아프다고 선고받자, 그가 세상을 보고 느끼는 방식은 부정당한다. 병든 자는 ‘흐름’에 낄 수 없다. 샙티머스는 점점 흐름‧세상으로부터 멀어진다.     


  저녁이 되었고, 파티는 무르익는다. 샐리 시튼은 도발적 생기를 잃고 부르주아의 아내가 된 채 아이들 얘기밖에 할 줄 모르는 지루한 사람이 되었다. 피터 월시는 떠돌이 낙오자가 되었다. 하지만 파티는 원활하게 진행된다. 클라리사는 자신이 상실한 무언가를 아릿하게 추억하지만, 파티의 행복이 이내 그 공허함을 덮는다.


  그때 샙티머스의 담당 의사인 윌리엄 경이 파티장에 도착해 샙티머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클라리사는 윌리엄 경이 자살 이야기를 꺼내 파티장의 분위기를 망칠까 걱정한다. 동시에 샙티머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는 왠지 그와—자살을 한 청년과—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하지만 가봐야 했다. 손님들과 어울려야 했다.”


  클라리사는 “자기 자신이 아닌 그저 어느 안주인의 역할을 하는 것은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 어느 안주인이라는 역할을 그녀는 다소 우러러보았고, 자기가 이 모든 일을 주재하고 있다는 느낌, 자기가 마치 이 시간, 이 장면을 있게 하는 중심축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샙티머스의 비극은 금세 잊혀진다.


  샙티머스의 자살마저 클라리사의 단단한 행복을 넘지 못한다. 클라리사는 이제 흐름과 ‘완벽히’ 하나 되었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슬픔이 느껴지지만 이제 그녀는 자기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해석할 수 없다. 온전히 느낄 수 없다. 파티, 조화로운 관계, 모두를 웃음 짓게 하는 일은 여자의 일이다. 여자라면 여기서 행복을 느껴야 하기에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이다.” 결혼은 흐름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이다. 샐리는 멍청해졌고, 클라리사는 자기 감정을 느끼는 법을 빼앗겼지만 흐름에 동참했다는 안정감이 이를 보상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이토록 슬픈 교환,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댈러웨이 부인》과 여성의 삶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댈러웨이 부인》이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영화 〈댈러웨이 부인〉(1997)을 먼저 보는 것도 좋다. 영화는 클라리사의 과거와 현재를 유려하게 오고간다. 여기에 클라리사의 독백을 더해 소설의 정수를 잘 담아낸다.


  《댈러웨이 부인》이 어떻게 여자의 삶 전반으로 확장되는지는 영화 〈디 아워스〉(2002)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세 명이다. 《댈러웨이 부인》을 쓰는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을 감명 깊게 읽고 가족을 떠날 결심을 하는 1951년의 로라, 에이즈로 죽어가는 전 애인을 위한 마지막 파티를 준비하는 2001년의 클라리사. 〈디 아워스〉는 이 세 여성의 삶이 어떻게 교차하고 연속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디 아워스〉 스틸컷


  《댈러웨이 부인》, 〈디 아워스〉는 여자의 하루에서 여자의 일생을 읽어낸다. 조화로움을 창조하는 일, 관계의 긴장을 떠맡는 일, 그 과정의 모든 수고로움을 감당하는 일. 이 모든 게 여자의 일이다. 여자들은 당연한 듯 이 일을 한다. 하지만 괴리감도 느낀다. 《댈러웨이 부인》, 〈디 아워스〉는 이 감정을 압도적인 섬세함으로 기록한 수작이다.


  사실, 이들이 그려내는 감정선은 굉장히 미묘한 것이어서 누군가에게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신경증 정도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얼떨결에 ‘흐름’에 휩쓸린 채 살아가며 우울함을 느끼는 누군가에게는 강렬한 각성‧위로‧연대의 서사로 다가갈 수 있다.


  즉 우리는 《댈러웨이 부인》, 〈디 아워스〉를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내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를 판별할 수 있다. 부디 당신이 이 작품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흐름에 일체감을 느끼는 사람, 흐름에 어긋나는 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행복을 배제하는 폭력의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클라리사와 샐리의 키스를 방해하는 두 남자들처럼 말이다.


  당신이 〈디 아워스〉의 로라처럼 흐름을 끊고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죽음 속에서 난 삶을 선택했어요.” 로라는 가족을 버린 여자라는 비난을 거부한다. 자신은 가족을 버린 게 아니라 삶을 선택한 거라고 말한다. 죽음이 아닌 삶.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여자들의 일'이 여자들을 죽이는 아이러니.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야기하는 슬픔. 이것이 《댈러웨이 부인》의 주요 정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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