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네 튀르머 《生이 보일 때까지 걷기》(살림, 2017)
잘 나가던 사무직 여성이 도보여행자로 변신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녀는 트래킹을 하며 내면의 단단한 토대를 다졌고 세상과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깨달았다. ‘여자 혼자’ 미국에서 가장 긴 3대 장거리 트레킹 코스를 걷는 것은 이를 위한 최선의 조건이었다.
첫 트래킹 도전에서 그녀는 젊고 근육질인 두 남성과 함께였다. 그녀는 잔뜩 기죽었다. 모든 면에서 자신이 그들보다 덜 준비됐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때 안내원이 위로(어쩌면 위로가 아닌 통계학적 사실)의 말을 건넨다.
그런데 통계적으로 보면 당신은 완주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에요. 여성이고, 혼자라는 점에서요. 혼자 여행하는 여자들은 준비를 정말 철저히 해 오거든요. 게다가 이들에게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어요.
조금 더 직접적인 동료의 말도 있다.
남자 둘이 걷다 보면 어느 쪽에서도 휴식을 취하고 싶다거나 좀 천천히 걷자는 말을 꺼내지 않아요. 자신이 더 빠르고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죠. 그러다 보면 걷는 일이 점점 더 경쟁으로 치닫게 돼요.
위 말에 책의 거의 모든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다. 주인공은 남들과 경쟁‧비교하며 괴로워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단단한 내면을 다져나가고 이를 기반으로 타인‧세계와 관계 맺는다. 모든 껍데기를 벗어내고 세상과 직접 소통하며 삶의 감각을 재조정한다.
이 모든 게 ‘여자’에게 더 유리하다. ‘여자’라는 범주는 관성적인 관계 맺음 방식에 익숙한 ‘남자’의 타자로 해석되어야 한다. 경쟁‧비교로만 맺어지는 관계에 소외감과 불만을 느끼는 모두가 ‘여자’다. ‘여자’는 생물학적 근거라기보다는 기존의 남성적(폭력적) 관계를 거부하는 모두에게 부여할 수 있는 이름이다. ‘여자’ 범주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아래의 인용구도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필요한 건 ‘현실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과감한 결단’이다.
여자들이 돌아다니기에 위험하기로 치면 이렇게 외진 트레일보다 미국 전역의 대도시들이 훨씬 더하죠. … 그런데도 많은 여자가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죠.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에요.
당장 모든 걸 때려치우고 트래킹에 도전해야만 그녀의 깨달음을 공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트래킹은 하나의 은유다. 비교‧경쟁이 앗아간 삶의 가능성을 안타까워하는 사람, 폭력적인 관계에 지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트래킹을 시작할 수 있다. 트래킹의 은유를 내 삶에서 무엇으로 대체할지는 본인의 선택이다.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행복감” 대신 “지극히 직접적이고 육체적인 체험”을 중시하기만 하면 된다. 머리로 계산한 것보단 몸으로 익힌 감각이 오래가는 법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동료는 최고의 선물이다.
스루하이커들에게는 모두 나름의 사연이 있지 않나. 당신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재미있는 책을 읽는 기분이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수고도 할 필요 없지. 책들이 스스로 우리를 찾아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