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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Jul 13. 2024

'어린이집' 앞에만 서면

  우리 아파트 1층에 ‘가정 어린이집’이 있다. 나랑 관련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그 집 앞에만 서면 호기심이 생긴다. 몇 살짜리 아이들이 왔는지, 지금 무슨 활동을 하는지 늘 궁금하다. 아이를 데려오는 부모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혹시 안이 들여다보일까 싶어 흘끔대기도 한다.


한 번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아이를 데리러 온 엄마와 선생님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 제가 아침에 아이 양말을 안 신겨서 데려왔나요?”

출근길에 얼마나 정신없었으면 이 쌀쌀한 날씨에 맨발로 데려왔을까.

“여분이 있어서 신겼어요. 아침에 너무 바쁘셨죠?”


매일 아침 돌봄 기관에 아이를 데려다 놓고 출근하는 게 보통 일인가. 깨워서 씻기고 먹이고 입히는 일련의 과정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일이다. 더구나 식구들 식사까지 챙기려면 새벽에 일어나도 턱없이 부족한 게 시간이다. 까치집을 지은 머리를 빗기는 둥 마는 둥, 옷은 뒤집어 입혔는지도 모른 채 아이를 안고 뛰는 모습이 그려졌다.


좌충우돌하던 나의 초보 직장 엄마 시절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출근길에 아이 둘을 직장 바로 옆에 있는 어린이집에 보낼 때였다. 처음 아이를 떼어놓던 날,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나와 분리되지 않으려고 울며불며 떼쓰는 통에 동네가 다 들썩거렸다. 다섯 살짜리로 곧이 안 들릴 만큼 강한 손힘이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아이를 인계받으려는 선생님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떼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아이와 함께 털썩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인정사정 두지 않고 발버둥 치는 바람에 안에 있던 선생님들까지 뛰쳐나오는 소동이 벌어졌다. 한꺼번에 여럿이 달려들자 사색이 된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자지러졌다. 얼마나 악을 쓰며 울어댔으면 목이 다 쉴 정도였다.

“엄마! 같이 가.”


아이의 양어깨를 꽉 잡은 선생님은 날 보고 빨리 가라 손짓하며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걸으라 했다. 무거운 걸음을 몇 발짝 옮길 때마다 귓전을 때리는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 점점 희미해져 갔다. 모퉁이를 돌 때쯤 몸을 숨기고 고개만 살짝 내밀어 보았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는 모습을 보는데 어찌나 가슴이 쿵쿵거리던지. 당장이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아냈다. 아이의 모습이 사라진 걸 보고, 안도인지 안타까움인지 긴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씩씩한 척 출근했다.


그날 아침, 직장은 나로 인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헐레벌떡 도착한 나에게 한 남자 선배가 건넨 말이 시초였다.

“늦었네.”

무심코 뱉은 이 짧은 말이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설움 보따리를 툭 건드렸다. 간신히 눌러놨던 울음이 봇물 터지듯 주르륵 쏟아졌다. 괜한 관심 표현으로 난처해진 선배한테는 미안했으나 언젠가는 터질 봇물이었다. 남편과 아이들, 시동생 둘까지 챙겨야 하는 서른 살짜리 초보 직장 엄마. 새벽에 눈을 떠서 식사 챙겨 남자들 출근시키고, 아이 챙겨 어린이집 보내느라 늘 힘에 부쳤다. 거친 물살 가르고 헤엄쳐야만 하는 고됨 아이까지 떼놓아야 하는 아픔이 한꺼번에 작용했었나 보다.


우르르 모여든 선배들이 목놓아 우는 나를 달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를 안에 두고 밖에서 문을 잠가놓고 출근한 적도 있어.”

“급해서 알지도 못하는 동네 할머니한테 맡겨둔 적도 있다니까.”

오래전 겪었던 일들을 끄집어내며 이 시기를 잘 넘기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덕담으로 울음바다는 수습되었다.


사랑의 손길을 원하는 또 다른 자식들을 위해 나 추스르고 일어나야 했다. 일단 업무가 시작되면 개인적인 일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엄마가 된 이후, 어린 눈망울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선명해지고 열정은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가정과 직장의 평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뇌의 기능이 신비로우면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퇴근 후 가보면 아이는 늘 혼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면 책은 냅다 팽개쳐버리고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는 다시는 보물을 잃지 않겠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내 양손을 움켜쥐었다. 하나둘씩 엄마 손을 잡고 가버린 친구의 빈 자리를 보며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을까.

 



요즘 아이 돌보는 게 어려워 출산을 포기하는 부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맞벌이 부부를 위한 ‘돌봄’이라는 제도에, 올부터는 ‘늘봄’이라는 제도까지 추가로 생겨났다. 말 그대로 늦게 퇴근하는 부모를 위해 밤 8시까지 학교에서 돌봐준다. 육아 걱정에서 벗어나 열심히 일하라는 취지는 좋으나 새벽에 나와 별을 보며 돌아가는 아이의 심정은 어떻게 위로받을까.


내 아이 둘은 엄마가 키워주셨다. 한가하게 집에 계신 분이 아닌데도 휴직을 고민할 때 ‘내가 키워주마’ 선뜻 나섰다. ‘아이 하나 키우려면 온 동네가 나서야 한다.’라는 말이 있듯, 그 힘든 일을 어쩌자고 덥석 안겨드렸는지. 남의 자식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라고 엄마는 몇 년을 앞당겨 늙어버리고 말았다. 아이를 무사히 길러낸 건 순전히 엄마의 공이다.

 

주변에 손주 돌봄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절대 봐주지 말라는 쪽과 봐줘야 한다는 쪽이 팽팽하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니 나도 덥석 안을 수 있는 문제이다. 엄마한테 받았던 은혜를 자식에게 돌려줄 기회로 삼는다면 결사적으로 손사래 칠 일은 아니다. 자식들이 아직 결혼 전이라 서두를 건 없으나 각오를 해두는 것도 그리 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어린이집’ 앞에만 서면 나도 모르게 흘끔던 이유가 다 있었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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