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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Jan 17. 2024

뚱한 부부와 닭살 부부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될까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한 두 부부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지하철 안에서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의 커플이 하차 안내 방송을 듣더니 문 쪽으로 움직였다. 남자가 앞에 서고 여자는 뒤에 섰다.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여자가 퉁명스럽게 말을 한다.

"뭐라는 거야? 응?"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들렸는데 그게 아니었다.

"뭐냐고? 왜 그러는 건데, 나한테."

따지듯 몰아세우는 소리에 내 몸이 다 움찔했다. 아마 주위 사람들도 경계 태세를 갖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이고, 하필이면 내가 이 여자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서 있을 게 뭐람.'


여자는 남편을 향해 자꾸만 구시렁거렸다. 남편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뭐라 대꾸하는데 여자는 계속 트집 잡는 말투로 일관한다. 부인을 제지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분명 처음 있는 일은 아닌 듯했다. 남편은 얼굴을 유리문에 고정시킨 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아마 속으로는 '빨리 다음 역에 도착해 다오. 제발!' 하는 심정이었을 테지.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왜?"

조용한 지하철 안에 세 번째 트집이 크게 울려 퍼졌다. 금방 날벼락이라도 떨어질 분위기다. 나는 눈알만 슬쩍 옆으로 돌려 여자의 실루엣을 스케치했다. 정면으로 봤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불똥이 나한테도 튈 수 있겠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화장 안 한 투박한 얼굴과 무뚝뚝한 표정에 생머리를 질끈 하나로 묶었다. 운동을 한 건지 살이 찐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큰 몸집. 키도 작고 맷집 또한 부인에 비해 왜소한 저 고개 푹 숙인 남편.

 

그럴 리야 없겠지만 부인이 남편한테 손찌검이라도 해서 남편 입장을 곤란하게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날더러 편을 들라면 당연히 남자 쪽이지만 여전히 정면으로 쳐다볼 용기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몸은 그대로 둔 채 눈알만 굴려 부부를 훑고 있을 게 분명했다. 못 볼 꼴 보지 않기 위해 다음 역에 빨리 도착하기를 바랐다. 드디어 정차하기 일보직전, 내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까 가슴 졸이며 숨죽이던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자기 부인이 허리를 굽히더니 남편의 등판에 얼굴을 갖다 대는 게 아닌가. 세상에 이런 일이. 그럼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연기였더란 말인가?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몇 분도 안 되어 포커페이스가 될 수 있을까. 좋은 일 한다며 섣불리 부부싸움을 말리기라도 했더라면 얼마나 무안을 당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무튼 부부는 무사히 내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몸을 돌려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는 듯했다.

남편의 등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는 것은 몸으로 표현한 사과의 의미였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뚱해도 나름 귀여운 행동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 역에서 깡 마른 중년 남자가 올라타더니 내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의자에 앉지 않는 편이라 자리를 양보한 꼴이었다. 차에 탈 때 남자는 기다란 문제집 같은 것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앉자마자 문제집을 펼치고 공부를 시작한다. 수험생인가? 만학도인가? 갑자기 궁금증이 몰려왔다. 아들이 공무원 시험 준비할 때 봤던 것과 비슷한 책이라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나 보다.   


저 나이에 공무원 준비는 아니겠지. 그럼 사법시험 준비? 아니면 박사 과정? 그렇다고 대놓고 '거기 책 좀 한번 봅시다'라고 할 수는 없어 그냥 상상으로 즐기는 수밖에. 그때 남자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아, 우리 여보야구나."

작지 않은 소리주위 사람들의 귀가 번쩍 뜨였을 것 같다. 아니, '여보야'라는 호칭에 놀라지 않았을까?

-(지금 어디예요?)

"여보야, 나 지금 여기 지하철 안이야."

아무리 뒤통수에 눈과 귀가 달린 나라고 하더라도 전화기 너머 부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저 쪽에서 물어보는 말마다 친절한 말투로 꼬박꼬박 답을 해주는 남편을 바로 앞에서 내려다보고 있지 않나. 정답에 비추어 문제를 유추해 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지금 어디쯤 가고 있어요?)

"여보야, 나 지금 당산역 지나고 있어."

-(저녁 다 해놨어요.)

"저녁 준비했다고? 알았어. 여보야. "

아마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고, 아직은 달콤한 신혼시절이라 그런가. 어떻게 남자 목소리가 저리도 나긋나긋 정다울 수가 있담.

-(올 때까지 밥 안 먹고 기다릴게.)

"그럼, 우리 여보야가 배가 고파서 어쩌지?"

결혼한 지 한참 된 사람한테서 저런 목소리 저내용이 나올 확률은 거의 0에 가다. 말끝마다 '여보'가 아닌 '여보야'가 입에 찰싹 붙어 버렸으니 한 몸이 되었다는 뜻일 테다. 으엑 닭살 돋네.


"여보야, 도서실 갔다가 집에 들어가면 8시쯤 될 것 같아."

-(조심히 오세요.)

"그래, 우리 여보야는 그동안 쉬고 있어."

저 전화통화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나도 모르게 걱정한 이유는 온몸으로 닭살이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남자는 문제집을 옆구리에 끼고 신촌역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목을 빼고 남자가 걸어가는 모습을 신기한 듯 돌려다 본다. 그 눈길의 의미는 무엇일까? 닭살 부부가 부러워서? 체신머리 없다고 흉을 보려고? 닭살이 된 내 피부는 남자가 내린 뒤 한참 뒤에서야 원상 복구되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극과 극을 달린 두 부부 중 어떤 모습이 더 이상적이냐고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결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이유를 잘 알 것이다. 성격대로, 형편대로 혹은 환경에 따라 만들어지는 게 부부의 모습일 테니. 이런저런 이유로 싸움을 자주 하는 사람도, 주위 사람한테 닭살 피해를 주는 사람도 남한테 평가받을 하등의 이유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각에도 지지고 볶으면서 가정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애쓰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삼 십년 가까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가 함께 가정을 이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 희생 봉사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이라는 덕목이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 하는 당연한 일.

   

잠시 젊은 부부의 모습을 훔쳐보며 아들을 생각해 본다. 결혼해야 할 시기를 맞아 서로 잘 어울리사람과 알콩달콩 오순도순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과연 어떤 여자가 아들의 짝꿍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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