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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수 May 04. 2023

성공적인 시도가 반드시 성공할 필요는 없다

첫 일반인 녹음과 첫 편집

성공적인 시도가 반드시 성공할 필요는 없다.   


  <빅 리틀 라이프>의 목표는 첫 방송 전에 절반 이상 사전제작을 해두는 것이었다. 당시 내겐 <두시탈출 컬투쇼> 연출이라는 만만치 않은 업무강도의 본업이 있었다. 내가 아무리 <빅 리틀 라이프>에 열과 성을 다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부업은 본업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도한 업무에 허덕이다보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부업인 <빅 리틀 라이프>의 완성도를 쉽게 포기해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나름의 구제책으로 사전제작을 선택한 것이다. 


  야심차게 사전제작 결심은 했지만 응해줄 사람이 없었다. 내가 무슨 유명한 드라마 작가나 영화 감독이 아닌 상황에서 누가 흔쾌히 인터뷰이로 참여해줄 수 있겠나.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우선 국내 오디오 시장에선 전례 없는 구성이다 보니 레퍼런스로 들려줄 만한 콘텐츠가 없었다. 오로지 내 구구절절한 설명만으로 이것이 어떤 콘텐츠인지를 소개하고 인터뷰 승낙을 받아야 했다. 승낙을 받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스토리텔링 콘텐츠이니만큼 인터뷰이에게 마땅한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무작정 ‘저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요청한다면 아마 전부 ‘그런 이야깃거리는 없는데요...’ 할 것이 뻔했다. 모두가 신이나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낼 수 있을 법한 소재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소재를 잡고난 뒤엔 그에 적합한 이야깃거리를 가진 인터뷰이를 내가 직접 찾아가야만 했다. 결국 초기단계에선 내가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친한 친구들 중에서 인터뷰이를 섭외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성사된 첫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친구 지혜였고, 소재는 ‘엄마’였다. 


  지혜와 처음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건 몇 년 전 비가 내리던 날, 홍대 부근의 훠궈집에서였다. 그 날 이전까지 우리는 같은 대학에 다니던 친구의 친구 정도의 사이였다. 함께 보기로 한 친구가 약속 한 시간 전에 사정이 생겨 나오질 못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단 둘이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일을 시작한지 3년 정도가 지난 때였고 지혜는 갓 취업한 때였으니 처음에는 취업과 회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왜 취업이 그렇게 간절했는지 가족으로부터의 경제적·정서적 독립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고, 그 과정에서 ‘엄마’라는 소재가 등장하자마자 별안간 모든 대화가 ‘유년 시절 엄마에 대한 기억’로 집중되었다.


  엄마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살아가는 딸이라면 대화 상대가 스쳐지나가듯 엄마를 잠시 언급만 해도 모녀관계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철저히 본능적인 판단인지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책임감, 죄책감, 원망, 상처 같은 것들이 끈적하게 얽혀있어 벗어나지 못한 딸들은 ‘엄마’라는 단어가 포함된 단 한 문장을 말해도 티가 난다. 반대로 모녀관계가 심플한, 그러니까 엄마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이야기하는 딸들도 금방 티가 나긴 한다. 그저 그들과는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나누고 싶지 않아질 뿐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굳건히 자리잡은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엄마 이미지에 구태여 끈적한 이미지를 덧씌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철저하게 전자였다. 평생 동안 엄마와의 관계가 인생의 숙제였다. 엄마를 떠올리면 죄책감, 책임감, 원망, 상처같이 어두운 감정들과 감사, 존경, 사랑 같이 밝은 감정들이 동시에 자기주장을 하고 나섰다. 어두운 감정을 우선시하자면 내가 소위 말하는 착한 딸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괴로웠고, 밝은 감정을 우선시하자면 엄마 때문에 괴롭고 외로워하던 어린 날들이 가여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기억도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남의 집 자식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차가운 기억부터 굉장히 사랑받았던 것 같은 따뜻한 기억까지 전부 내 머릿속에서 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당시까지도 엄마와의 관계는 변덕스러웠다. 하루는 멀쩡하고, 하루는 파괴적이고, 또 하루는 애틋해하는 식으로 기이한 양상을 띠었다. 그런데 마침 지혜의 모녀관계도 나와 상당히 비슷했던 것이다. 


  우리는 엄마에 관한 가벼운 한 마디에서 서로가 동족이라는 걸 동시에 알아차렸고, 오후 네시 쯤 시작된 대화는 열두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비가 잔뜩 오는 날 비닐우산 하나를 나눠쓰고 택시를 타는 한이 있어도 끈질기게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밤을 돌이켜보면 외현으론 성인이 된 지혜와 도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기실 교복을 입은 어린 지혜와 어린 도수가 앉아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우리는 그들을 토닥여주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나만큼 불행하지는 않은 사람들 앞에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던 이야기를 전부 꺼내놓을 수 있었다. 엄마에 관해서라면, 지혜가 나만큼 불행해서 오히려 좋았다. 


  장장 열두시간의 대화를 마치고 목은 다 쉰 채로 귀가하는 택시에 올랐다. 한강 너머는 어느새 동이 트려하고 있었다. 어슴프레 밝아오는 한강을 건너가며 나는 처음으로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 관한 마음의 방에 난생 처음으로 빛이 들이닥치는 기분이었다. 엄마에 관한 한 나는 언제나 외로운 죄인이었는데 그제야 홀로 외로운 죄인이 아니게 되었고 혼자가 아니라서 죄인도 아닐 수 있었다. <빅 리틀 라이프>에서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들’ 회차를 제작했던 이유는 이런 경험 때문이었다. 내가 그 날 지혜와의 이야기에서 느꼈던 안도감과 연대감 이 방송을 듣는 누군가도 느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렇게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혜였기 때문에 인터뷰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수월했다. 지혜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마이크와 녹음파일을 소중히 품에 안고 회사에 돌아오면서 나는 안심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잡힌다’고 오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편집기에 녹음파일을 얹으니 총 러닝타임으로 찍힌 시간이 무려 120분이었다. 내가 <빅 리틀 라이프>에서 인터뷰이 한 명에게 할당한 시간은 고작 6-7분이었다. 녹음파일을 20분의 1로 줄여야했다.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할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가편집을 시작했다. 편집기 앞에 처음 앉은 시간이 오후 9시 정도였는데, 자정이 넘은 뒤에도 나는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세 시간 동안 내가 걷어낸 분량은 고작 10여분 남짓이었고, 머릿속에는 김연우의 ‘이별택시’가 계속 맴돌았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우는 피디가 처음인가요...’


  나름대로 편집을 빠르게 하는 편이라고 자부해왔기 때문에 편집기 앞에 앉아서 이토록 막막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정확할지 모르겠다. 어두운 밤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무동력 난파선이 된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랐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순서로 가야할지도 몰랐다. 내가 손을 대면 댈수록 지혜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편집하지 못하고 쫌쫌따리로 걷어내다보니 몇 시간이 지나도 10여분밖에 걷어내지 못한 것이다. 


  머리로는 알았다. 몇 번의 인터뷰가 더 반복되고, 몇 차례의 편집을 거치고 나면 스토리텔링 콘텐츠 편집도 자연스럽게 손에 익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돌이켜보면 <두시탈출 컬투쇼>를 처음 맡고 하이라이트 다시듣기 편집을 처음 맡았을 때에도 ‘도대체 두 시간 분량을 어떻게 5분짜리로 줄이라는 거지?’라며 머리를 쥐어뜯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하이라이트 다시듣기 편집을 할 때 처음만큼 머리를 쥐어뜯지 않고도 익숙하게 해내고 있으니까, <빅 리틀 라이프> 편집도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 해결 될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내게 필요한 건 과감함이었다. 120분 분량의 오디오 파일에서 숨소리 조금 걷어내고, 말 조금 더듬는 걸 걷어내는 걸로는 도저히 6-7분까지 줄일 수가 없었다. 큰 덩어리를 과감하게 걷어낼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좀처럼 용기가 생겨나질 않았고 아무리 손대도 줄어들지 않는 녹음파일을 그대로 두고 찝찝하게 퇴근했다. 오늘 하루의 마무리가 이럴 줄은 몰랐다. 첫 번째 인터뷰이가 지혜였고 소재가 엄마라는 건 이미 시험문제를 아는 채로 시험을 치러 가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숱한 날들을 울며불며 고민해온 소재인데다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터뷰이라면 이렇게 막힘이 있어서는 안 됐다. 내가 상상한 오늘 밤은 성공적으로 가편집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퇴근하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다. 시험문제를 미리 봤으면서도 시험을 망친 셈이다. 바보같이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일기장에 한탄만 써내려갔다. ‘우선 시작부터 하라’는 말에 <빅 리틀 라이프>를 시작은 했으나 이건 내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기획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기획의 최종 목표를 ‘성공’이 아니라 ‘성공적인 시도’ 자체로 대폭 축소했다. 혼자 일하니 이런 건 좋았다. 목표 변경에 누구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빅 리틀 라이프>를 성공시키는 것보다도, 온전한 내 기획인 <빅 리틀 라이프>를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잠들었다.


  당시 내가 개념화했던 성공과 성공적인 시도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 스포츠 이야기를 빌려오려 한다. 나는 평소 여가시간에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국내 프로 스포츠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이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야구,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배구와 농구, 이렇게 챙겨보다보면 지루할 새가 없다. 전 국민이 하나 되는 올림픽처럼 온 나라가 들썩이는 흥분까진 아니어도 매일 밤 소소하게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걸 감각하는 건 꽤나 짜릿한 경험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프로 스포츠 경기를 시청하다보면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뭉클한 장면들을 때때로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감동적인 장면들은 주로 성공했을 때보다도 성공적인 시도가 이루어졌을 때에 연출된다. 


  한국여자프로농구 리그에서 벌어진 일이다. 중학교 때부터 유망주라 불리던 청소년기를 거쳐 프로리그에 입단한 선수가 있다. 스무 살에 불과했지만 언론은 그녀를 에이스라 불렸다.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어느 경기 날, 연이어 공격실패를 하는 등 플레이가 유독 풀리지 않았다. 팀에서는 스무 살 에이스에게 계속해서 공격기회를 만들어줬지만 득점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마지막 기회인 4쿼터에 들어서서는 무려 15분간 무득점을 이어갈 지경이었다. 공격하는 몸놀림에는 점점 망설임이 잔뜩 묻어나게 되었고, 공격기회가 와도 직접 공격하지 않고 공을 뒤로 돌리기에 이르렀다. 감독은 작전타임을 외친다. 벤치로 선수들을 불러놓은 감독은 잠시 골몰하다가 스무살 에이스를 콕 찝어 이렇게 소리친다. 


  “너 오늘 게임 져도 돼. (감독인 내가) 게임 져도 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자신있게 1:1로 붙어. 야 뭐가 무서워? 뭐가 무섭냐고! 어? (경기) 나가봐.” 


  감독이 승리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은 결코 쉬운 결심이 아니다. 승리를 포기하더라도 감독에겐 이 선수가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게 훨씬 중요했다. 이 어린 선수가 감독과의 작전타임 이후 어떻게 달라졌을까. 작전타임 이후 첫 번째 공격부터 자신 있게 뛰어들었다. 득점하진 못했다. 그리고 또 다시 두 번째 공격, 세 번째 공격을 시도한다. 아주 자신감 넘치는 몸놀림으로 말이다. 17분간의 무득점 시간을 흘려보낸 뒤, 드디어 득점에 성공한다. 스무 살의 에이스 선수는 무득점을 깨고 이후 클러치 상황에서만 6득점을 연달아 내며 경기를 승리로 이끈다. 우리은행의 위성우 감독과 박지현 선수 이야기다. 


  이 경기가 우리은행팀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다소 애매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성공적인 시도와 성공 자체는 엄연히 다르다. 성공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라면, 져도 괜찮으니 자신감있게 밀어붙이는 경험을 해보는 건 성공적인 시도이다. 위성우 감독이 이 날 경기에서 선택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성공적인 시도였다. 반드시 무언가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는 작전타임 이전의 어린 선수가 그랬듯 뻣뻣하고 의기소침한 몸놀림 밖에 나올 수가 없다. 


  물론 내겐 “져도 되니까 일단 자신있게 해봐”라고 소리쳐주는 감독님은 없었지만 성공적인 시도가 반드시 성공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 반복해서 뇌까린 덕분에 두 번째 가편집과 세 번째 가편집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120분 녹음본을 6분 분량으로 줄이면서 가장 중요했던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안 되면 폐기하고 다시 하지 뭐’라는 태도였다.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버린다는  말이 좀 무책임하게 느껴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책임감에 짓눌려서 옴짝달싹 못하는 것보다는 무책임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책임감이나 완벽함에 대한 강박 같은 것들은 걸리적거릴 뿐이었다. 여러 번을 폐기한 끝에 마침내 첫 번째 인터뷰 편집을 완성했다. 성공적인 시도라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너무 많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편집단계에서 이렇게 고생하지 않으려면 인터뷰 때부터 어떻게 줄기를 잡고 이끌어가야 하는지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인터뷰에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서사구조가 잘 짜인 스토리텔링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스탠스를 취했을 때 인터뷰이는 신나게 이야기하고 이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될 제3자는 진입장벽 없이 몰입할 수 있을지 점점 감이 잡혔다. 만약 시행착오 없이 첫 번째 시도가 잘 마무리되었다면, 그 시도는 성공은 했을지언정 성공적인 시도였다고 자평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내가 첫 번째 일반인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깨달은 바로는 그렇다. 승부에 한해서라면 반드시 승리해야지만 성공일 테지만, 시도에 한해서라면 반드시 성공하지 않아도 성공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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