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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수 May 04. 2023

슬픔의 티키타카

우리의 슬픔이 마주칠 때

슬픔의 티키타카

-우리의 슬픔이 마주칠 때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반복해서 보는 바람에 거의 모든 대사를 외울 지경인 드라마가 있다. 2008년 KBS에서 방영되었던 <그들이 사는 세상>인데, 거기에 여자주인공이 이런 내레이션을 하는 장면이 있다. 


“왜 어떤 관계의 한계를 넘어야 할 땐, 반드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아픔을 공유해야만 하는 걸까? 그냥 어떤 아픔은 묻어두고 깊은 관곌 이어갈 수는 정말 없는 걸까? 그럼 나는 이제 정지오(현 애인)와의 더 깊은 관곌 유지하기 위해선, 정말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엄마에 대한 이야길 해야만 하는 걸까? 그러고보니 강준기(구 애인)한테도 난 아무 얘길 한 적이 없었다. 정말 서로의 아픔에 대한 공유 없인, 그 어떤 관계도 친밀해질 수가 없는걸까?”


  나는 이 드라마를 대체로 수긍하며 봤으면서도 이 내레이션에는 극구 저항하고 싶었다. 비밀을 털어놓고 아픔을 공유해야만 친밀한 관계가 가능하다니! 비밀을 화폐 삼아 물물 교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등가 교환하는 게 진짜 비밀, 진짜 아픔, 진짜 관계일 수 있는 거야? 어휴 구질구질하게들 산다 정말. -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쿨 병’에 걸려있던 10대 시절이었다.


  점점 어른이 되면서 깨달았다. 비밀이 은밀하면 은밀할수록,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도저히 ‘쿨’할 수가 없어서 비밀과 아픔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걸. 관계라는 건 생각보다 힘이 없고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유기체 같아서, 비밀과 아픔을 식량처럼 먹이야만 비로소 단단해지고 두터워진다는 걸. 살아가는 건 어찌할 도리 없이 자꾸만 뒤통수를 맞고 슬퍼지는 일의 반복이라서 좀 구질구질해 보이더라도 우리끼리 이렇게 슬픔을 주고받으면서 버틸 수밖에 없다는 걸.


  다만, 슬픔을 주고받는 데에도 일종의 티키타카가 필요하다. ‘티키타카’란 원래는 탁구공이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뜻하는 말인데, 방송국에선 특정 출연진끼리 합이 잘 맞아서 멘트를 잘 주고받는 페어를 일컬을 때 ‘티키타카가 좋다’고 표현한다. 티키타카가 잘 맞는 페어가 있고, 죽어도 안 맞는 페어가 있다. 슬픔을 교환할 때도 마찬가지다. 티키타카가 잘 맞는 상대가 있고, 죽어도 안 맞는 상대가 있다. 


  내가 처음 가족사를 털어놓던 날, 친구와 나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 날 신촌의 밤공기 냄새는 아직까지 생생하다. 정처 없이 그렇다고 어딘가에 멈춰 설 생각도 없이 내딛던 친구와 나의 발걸음 소리, 비포장도로를 걸을 때마다 자주 발목을 삐는 나를 배려해 조심조심 내 걸음에 맞추어 걸어주던 친구의 보폭, 행여나 내가 울지 않는지 염려하면서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나를 살피던 곁눈질 같은 것들 말이다. 내 이야기가 끝난 뒤 친구는 잠깐을 망설인 뒤, 자신이 고등학교 때 겪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친구가 들려준 자기 가족사는 내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 다른 이야기였지만, 그녀가 선뜻 꺼내놓은 자기 슬픔을 나는 먹이처럼 받아먹었고 그 뒤로 더 이상 홀로 슬프지 않았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나의 유년시절 장소만 다른 곳에는 또 혼자 슬픔을 견디고 있던 친구가 있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이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 당시 친구보다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잠긴 당사자를 앞에 두고 “야, 내가 더 힘들어”라며 본인의 슬픔을 훈장처럼 늘어놓는 광경을 아주 자주 목격했다. 갑자기 내리꽂힌 낯설고도 화려한 훈장에게 당사자의 원래 슬픔은 초라하게 슬픔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몇 년 전의 친구를 떠올렸다. 그녀의 슬픔은 대체 어떻게 내 슬픔의 자리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나를 덜 슬프게 한 걸까. 그녀의 슬픔은 대체 어떻게 훈장이 아니라 반창고처럼 나를 감쌀 수 있었던 걸까. 


  친구의 슬픔을 앞에 두고 “야 내가 더 힘들다”며 경쟁하듯 반응하면 그 관계는 곧 숨이 끊어지고 말테다. 슬픔의 티키타카는 자랑스럽게 조커를 내밀어 승기를 가져가는 카드게임이 아니다. 전투적으로 내 패를 던지고 재빨리 승리의 종을 울리는 데에 혈안이 되는 ‘원게임’이나 ‘할리갈리’와는 달라야 한다. 슬픔을 교환할 땐, 빠르고 전투적으로가 아니라 신중하고 차분하게 임해야 하므로 차라리 ‘젠가’나 ‘모래성 덜어내기’와 닮았다. 어차피 우리가 슬픔을 내놓는 이유는 내 앞에 마주앉은 친구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함이니까.  


  한 쪽의 슬픔이 다른 한 쪽의 슬픔에 의해 정복되는 대화에선 아무도 위로받을 수 없다. 정복자는 그저 제 슬픔과 불행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확인을 받고 더욱 자기연민에 젖어갈 뿐이고, 피정복자는 슬픔의 자리마저도 빼앗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슬픔을 내놓으려는 경우라면 조금 더 조심하는 게 좋겠다. 내가 상대를 구원한답시고 상대의 슬픔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러니까 모래성 정상에 꽂힌 깃발이 기울어 쓰러지지는 않는지, 젠가탑이 행여나 흔들려 무너지지는 않는지 계속해서 상대를 관찰해야한다. 몇 년 전 신촌의 밤거리를 함께 걸으며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던 친구의 모습이 딱 그랬다. 내 슬픔의 젠가에서 한 블록이라도 빼주려는 듯이 신중하게, 내 슬픔의 모래언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듯이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내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도록 조심조심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아픔 같은 건 묻어두고 깊은 관곌 맺을 수는 없는 거냐고 묻던 여자주인공은 결국 더 친밀해지고 싶은 타인에게 아픔을 털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된다. 한 번도 한 적 없는 가족 얘길 애인에게 털어놓기도 하고, 친구한테 지금 자기 곁에 와달라며 울며 전화를 걸기도 한다. 그녀가 아픔 대신 묻어두기로 한 건 아마 두려움일 테다. 내 경우가 그랬다. 여태껏 굳게 잠가두고 혼자만 드나들던 공간에 타인을 들인다는 두려움, 타인에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약점을 내비쳐야 한다는 두려움, 꾸며낸 외양과 다른 실제 모습에 실망할까 싶은 두려움 때문에 슬픔이나 아픔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슬픔의 티키타카를 경험한 뒤엔 이런 두려움쯤은 묻어둘 용기가 생겼다. 그것이 바로 슬픔의 티키타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하나다. 


  슬픔의 티키타카를 주고 받으며 우리는 나의 인생이 누군가의 인생보다 더 어렵다고 섣불리 예단하지 않을 수 있다. 서로를 향해 밝은 눈과 열린 귀를 가질 수 있다. 타인의 너비와 깊이 앞에 겸손해질 수 있다. 그러면서 비로소 독불장군 혹은 유아독존에서 벗어나 세상을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인 자아가 완성되는 것 같다. 슬픔의 왕이 되기보다는 슬픔의 백성이 되어 함께 울어주는 것, 그것이 내가 정의하는 슬픔의 티키타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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