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연락하지 않지만 잊히지 않는 친구가 있나요?
아픈 손가락 같은 관계를 하나하나 꼽다보면 죄다 후배들이다. 내 무심한 성격 탓에 잘 챙기지 못했던 후배, 내 옹졸한 마음 때문에 작은 실수를 눈감아주지 못해 품지 못한 후배, 내가 믿음을 주지 못했는지 힘든 일을 저 혼자 몇 년 동안 끙끙댔던 후배.
나를 서운하게 한 선배는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가 되지 못하는 걸까. 매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한 후배가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동아리를 했었는데, H는 그 곳에서 만난 후배였다. 그래봤자 둘 다 이십대 초반이었지만, 학번차이는 꽤 났던 탓에 나는 그녀 앞에서 짐짓 어른인 척 하곤 했다.
어른인 척이란 바쁜 척, 시니컬한 척, 귀찮은 척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진짜 어른의 면모가 아니라는 걸 그 때는 몰랐다. 당시 나는 가까운 미래조차 너무 막막하게 느껴지던 취업 준비생 시절이라, 취업과 생존 외엔 그 무엇에도 마음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당시 나를 멀리서 보았다면, 아무리 해가 쨍쨍한 날에도 내 머리위에만 먹구름이 둥둥 떠 있는 기이한 형상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세상의 고뇌란 고뇌는 다 짊어진 양 굴었다. 위악을 부리는 내게 과분할 만큼, H는 항상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선배들 모두에게 그랬다. 가끔 그녀의 대책 없는 애정표현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동아리 방에서 마주칠 때마다 H는 특유의 곰살맞은 표정과 목소리로 언닐 봐서 너무 좋다며, 이 노래를 불러 달라, 저 노래를 불러 달라, 노래가 싫으면 기타 반주만이라도 해달라며 곧잘 부탁을 해오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매번 다음을 기약했다. 마치 지금은 그런 시답잖은 놀이에 쓸 시간이 없다는 듯이, 나에겐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밀려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부탁만 거절한 것이 아니다. H가 내 생일날 연필로 꾹꾹 눌러 써준 편지도, 밥 사달라는 애교 섞인 연락도 나는 모두 무감하게 넘겼다.
그러다가 졸업 직후 나는 낯선 지방으로 이주하게 됐다. 지방에 본사를 둔 회사에 취업하게 된 탓이다. 그 곳은 역사적으로 대표적인 유배지로 꼽힐 만큼 서울과 동떨어진 지역이었다. 거기서 머문 시간은 1년 6개월이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시간 동안 참 많은 친구들과 서서히 멀어졌다. 마치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아주 서서히 페이드아웃 되는 바람에 아무도 음악의 볼륨이 줄어들고 있단 것조차 눈치 챌 수 없는 것처럼, 나조차도 내가 친구들과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다시 서울로 이직하고 난 후, 한동안 연락하지 않던 이들에게 갑자기 연락을 하기가 망설여졌을 때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먼 곳에서 사회 초년생의 시기를 보내는 동안 많은 친구들과 멀어지고 말았구나, 내가 그들을 놓쳐버렸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을 다시 붙들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포기한 사람들 중엔 H도 포함되어있었다.
서울 토박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갓 상경한 사람처럼 외롭게 서울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이직을 했고, 서울의 한 시사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조연출로 일했다. 그 때 나의 주된 업무는 이른 아침에 생방송을 끝낸 뒤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내일 방송에 내보낼 아이템을 찾는 일이었는데,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기 위해서 보도국 내부시스템에 로그인 해서 각 취재부서를 통해 들어오는 단신이나 취재 현황들을 살펴본다. 그러다 눈에 걸리는 소식이 있으면 기억해뒀다가 오후에 있을 아이템 회의에서 발제하는 식이었다. 그러니 발제에서 제작진을 전부 설득할 수 있을 만큼 큰 사건들을 골라내야만 했고, 그 외에 나머지 ‘잔잔바리’ 사건들은 그저 흘려보내야 했다. 그 날은 유난히 사소한 사건 사고 소식들이 많이 들어왔다. 나는 권태롭게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새로고침 버튼만 누르며 새로운 아이템을 기다렸다.
그 때였다. 국제부 타이틀을 달고 짧은 소식이 새로 올라왔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영국의 해안에서 한 아시아 여성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는데 아마 20대 한국인 여성으로 추정된다.’ 나는 눈으로만 읽고 대수롭지 않게 다음 소식으로 넘어갔다. 방송 아이템이 되기엔 사소하다고 생각했다. 회의에 발제했다가는 속된 말로 ‘약하다’고 질타 받을 게 뻔했다. 이 사고에 어떤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의미가 있느냐고 말이다. 나는 더 거대한 사건을 기다렸다. 그 사고 소식은 여타 다른 사소하고 수많은 사건사고와 함께 기억에서 희미해져갔다.
며칠 뒤 H의 SNS에 부고가 올라왔다. 자기 언니가 사고를 당해서 부고를 알린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알기로 H에겐 여동생만 있고, 언니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H의 여동생이 언니의 계정으로 작성한 글이었다. 그러니까 사고를 당했다는 고인이 H였다. 후배 H 본인의 부고였던 셈이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동아리 친구들의 단톡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부고를 봤느냐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서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막을 알지 못했다. 영문을 모르고 황망해하는 말들만이 대화창에 가득해졌다. 그 때 누군가 단톡방에 외신 기사를 하나 올렸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사를 읽어보니,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한 아시아 여성이 혼자 해안절벽으로 여행을 갔고, 절벽 가까이를 걷고 있었는데, 하필 절벽의 가장자리 부분이 침식되며 무너지는 바람에 추락했고, 동행인이 없었던 탓에 뒤늦게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제야 몇 달 전 H에게서 연락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고, 그 전에 한 번 보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나는 또 얼렁뚱땅 답장했다. 구체적인 약속을 언제일지 모르는 그녀의 귀국 후로 미뤘었다.
기사를 읽은 우리는 단톡방에서 서로에게 H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냐고 물었다. 사라져버린 그녀의 가장 최근 소식이라도 건져 올리고 싶었나보다. 나는 그저 조용히 있었다. 적어도 나는 확실히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영국으로 떠난 이후로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으니까.
아주 오랜만에 보는 동아리 선후배·동기들과 함께 여수에 마련된 빈소를 찾았다. 영국에서 먼 길을 와야 하는 H는 인천공항에 내려 여수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H가 없는 빈소에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별 일은 없느냐고, 힘든 일은 없느냐고, 기쁜 일은 없느냐고, 우리 이제 시간을 내서 얼른 한 번 만나자고. 이런 말들이 대화상대만 바뀌어가며 계속 반복되었다. 모두 어딘가 절박해보였다. 몇 년 전의 근황에서 멈추어버린 서로의 현재를 반드시 움켜쥐어야 한다는 듯 필사적으로 안부를 묻고 답했다.
그 날 이후 반복해서 꾸는 꿈이 있다. 꿈에서 나는 어른인 척 위악을 부리는 게 아니라 진짜 어른처럼 H에게 다정하게 군다. H와 대화를 할 땐 딴 짓을 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밥 사달라는 말에는 냉큼 휴대폰 캘린더를 켜 날짜를 잡고, 내가 최근에 맛있게 먹었던- 학생 신분으로는 가본 적 없을 법한 식당에 데려가 밥을 든든히 먹이고, 요즘 고민은 없는지 기쁜 일은 없는지 근황을 먼저 꼼꼼하게 묻고, 노래도 불러달라는 대로 다 불러주고, 몇 번의 말실수는 관대하게 넘어가주는 그런 꿈이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다.
동아리 친구들과 가끔 H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의 미안함과 죄책감을 꺼내놓으며, 서로를 꾸짖는 건지 위로하는 건지 모를 대화를 한다.
“H는 참 선했어.”
“해맑았지. 해사했어.”
“그래서 스스럼없이 좋은 걸 좋다고 표현하며 다가왔던 걸 텐데, 우리는 그런 무조건적인 애정을 엎드려 감사해해도 모자랄 판에 왜 부담스러워했을까?”
“우린 호사를 부린 걸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약아서 H에게 무감했던 걸까?”
“약속을 자꾸만 미뤄도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것 같고, 부탁을 거절해도 꽁하지 않고 다음 번에 또 맑게 웃으며 다가와줄 거라고 믿은 거지. 나도 모르게.”
“피도 살도 안 섞은 타인이 우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줄 수 있다는 건 사실 굉장히 드물고 귀한 경험인데. 우리가 못됐어.”
“우리가 앞으로 수없이 갱생한다 해도 절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거야.”
“우린 누군가한테 수없이 거절당하고 상처받더라도 업보인 셈 쳐야 해.”
사실 위 모든 문장의 ‘우리’는 ‘나’로 바꿔 써야 옳다. 이렇게 우리의 잘못이라고 하면 나의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줄 알고, 말하면서도 쓰면서도 자꾸만 ‘우리’를 들먹인다. 그러니 바로 쓰자면 이렇다. 나는 H의 무조건 적인 애정을 부담스러워하고 귀찮아하는 호사를 부렸다. 내가 너무 약아서 H에게 무심했다. 내가 반복해서 약속을 미뤄도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걸 알았고, 부탁을 거절하더라도 나에게 실망하거나 서운해 하지 않고 다음번에 다시 곰살 맞게 다가와줄 걸 알았다. 타인이 나를 무작정 이렇게까지 좋아해준다는 건 감사해야 마땅한 일인데, 내가 참 못됐다. 나는 앞으로 어떤 좋은 일을 한 대도 절대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나는 누군가에게 재차 거절당하며 상처를 받더라도, 억울해 해서는 안 된다. 업보인 셈 치고 살아야 할 것이다.
내가 H에게 빚진 것들은 오래도록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갚겠지만, 어떻게 해도 끝내 다 갚아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H를 떠나보내고 나는 현재의 마음을 미래로 미루는 일을 하지 말자고 매번 다짐한다. 멀리서 마음으로 응원하는 대신 당장 시끄럽게 안부를 묻는다. 좀 부끄러워도 네가 나를 좋아해줘서, 내 옆에 친구로 있어줘서 너무 기쁘다고 매번 고백한다. 연락한지 오래되었다고 서서히 멀어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는 대신, 나는 오랜만에 문득 네가 보고 싶어졌다고 우리 한 번 시간을 내서 만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이런 건 꿈속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