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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홍 Dec 02. 2020

#3 참을 수 없는 순간의 울림

제주의 아침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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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 FM을 켠다. 계획 - 나름의 목표 - 으로 오전 일정을 야무지게 잡아 놓았지만, 제주의 선선한 아침 바람은 조금 느릿한 게으름을 주문한다. 댓바람부터 열어 놓은 문으로 풀모기가 들어온 모양이다. 팔꿈치 바깥을 살짝 물렸나 했더니,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웅웅대는 음악이 채 한 곡도 지나기 전 크게 부풀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가는 게 간지럽기는 한가 본데 죽을 만큼은 아니다. 살짝 시원해진 공기가 모기 입을 비뚤어 버린 모양이다. 기왕이면 더 비뚤어 주었으면 좋겠지 싶다. 묵직한 첼로 선율과 모기를 향한 저주가 뒤섞인다.



      하릴없이 흐르는 시간이 아쉬워,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랐다던 내일을 살고 있는 내가 죄스러워, 보다 보람 있게, 보다 알차게 시간을 '잘'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채 또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내가 잠시 멈춘다. 사실 세상은 나 하나쯤 없어도 잘 돌아간다. 내가 오늘 기안서를 올리지 않는다고 회사가 부도나지 않으며, 내가 밥을 차리지 않아도 가족은 굶어 죽지 않는다. 내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연인은 한눈팔지 않으며 - 혹여 그런 상대라면 빠른 손절이 이득 - 내가 세상을 잊는다고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으로 시작하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가정은, 더욱이 그것이 부정적인 결말로 치닫는다면, 반드시 나를 갉아먹는다. 그렇게 남은 나는 결국 한 줌이다. 나를 지금의 나인 것으로, 과거의 어떤 모습도, 미래의 어떤 불안으로부터도 벗어난, 그저 오롯이 나이게 함이 필요하다.




제주에서 맞는 아침의 아침




      제주에서 맞는 아침의 식사가 나에게 그렇다. 새벽 6시 무렵이면 조용히 일어나 아침을 시작하는 그이는, 잠이 많은 나에게 참 신기한 사람이다. 내 진심을 비추자 도시에 살았을 적엔 늦잠 자기 일쑤였으나 제주에 온 후 생긴 새로운 습관이라 고백한다. 그의 루틴은 울림이다. 행여나 내가 깰세라 밤새 모여든 화장실의 딱정벌레를 조심스레 치우고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메뉴는 그날그날 냉장고의 재료에 따라 결정되는 모양이다. 전날과 비슷하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요리가 올라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한 것은 물론 맛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다. 어쩌면 누군가를 위했던 재료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운해할 일은 아니다. 날 위해 음식을 한다는 것이 정성 그 이상인 걸 아는 탓이다. 오늘 아침은 오직 나의 것이다.




빨랫줄의 이불을 두고 파란 하늘과 녹색 대문은 기가 막힌 배경음악이 된다.




      아침을 먹을 때 시선은 늘 창밖이다. 언제 가져다 내어 널었는지 이불이 바람에 사부작거리고 있는데, 그게 또 꽤 괜찮은 감상을 준다. 울림이 따뜻하다. 모든 걸 천천히 음미할수록 머리가 따라 천천히 비워진다. 분명 이불을 보고 있다 여겼으나 그 사이 어딘가의 공기를 응시하는 듯도 하다. 이내 속세의 번뇌가 사라진다. 남들은 요가라도 몇 동작 해야 가닿을 경지를, 누군가는 이렇게 다다른다. 제주의 아침이 주는 선물이리라. 바람에 지난밤이 흩날린다. 점심 무렵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이불엔 햇살만이 남을 것이다. 늘 그렇듯 햇볕 냄새에 얼굴을 폭 묻을 테다. 그러고는 한참을 행복해하다 하루치 힘을 내야지.




다녀올게, 저녁에 다시 만나!




일상으로 돌아온 후 생긴 아침 습관. 그날의 햇살이 너무 그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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