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토리아빠 Oct 05. 2022

도깨비풀같은 여자, 민들레 홀씨 같은 남자

은희와 상우

1. 도깨비풀같은 은희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불던 오후 산책길에 B는 동네의 골목에 위치한 기묘한 가게를 하나 발견했다.

간판도 없이 알루미늄 새시 사이의 유리창에다가 페인트 마커로 <문화예술발전소>란 글씨가 적혀 있었고 실내에는 간소한 가구들 사이로 각종 악기와 몇 가지 미술품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어두운 실내를 기웃거리는데 등 뒤에서 라디오에서나 들을 법한 뭔가 고급진 음성이 울렸다.

"어떻게 오셨어요?"

B가 뒤돌아 보니 단발의 아가씨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은근슬쩍 뒷걸음치며 달아나려는 B를 몇 마디 자연스러운 말로  적당히 붙잡았다.

신기하게도 잠시 붙잡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어느덧 함께 거리를 걷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인디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이며 현재 같은 동네 한국계 미국인 제임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이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여러 젊은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어 나가고 있고 여러 가지 공동작업들을 하기도 하는데 틈틈이 동네 주민들에게 악기교습도 병행하고 있다는 장황한 이야기들을 부담스럽지 않게 늘어놓았다.

작은 접점을 두 번째 단계로 잇는 것은 어쩐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인데 그녀는 아주 쉽게 그 일을 했고 그 연결이 반복되다  보니 B는 어느덧 그녀와 친해지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은희라고  했다.

은희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자신의 방향으로 끌어들이는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는 독보적인 음색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부르는 감성적인 노래였다.

그것이 그녀를 매력적으로 만들고 돋보이게 했다.

그녀의 말처럼 작업실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

작가 디자이너 화가 뮤지션 등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평범한 사람 B는 그곳에서 홀로 낯선 이방인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때때로 그녀의 작업실에서 자의 가게를 위한 준비작업들을 했고 그녀 혹은 그녀 주변의 사람들과 B 부부는 여기저기서 어울리게 되었다.

그들은 주말이면 추운 겨울밤 난로 앞에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밤을 새기도 했고 눈 오는 밤 연주를 하며 술을 마시기도 하고 햇살이 좋은 날은 창가에 모여 앉아 책을 읽기도 했다.

가끔은 은희의 남자 친구 정욱과 B의 아내 지수까지 넷이서 모여 밥을 먹기도 했는데 남자 친구 정욱은 어딘가에서 신인상을 수상하고 등단한 시인이었다.

험상궂은 얼굴에 커다란 덩치, 장발을 휘날리며 늘 검은가죽라이더재킷에 찢어진 청바지에 처커부츠 차림으로 다니던 그는 강렬한 첫 이미지와는 딴판으로 어딘가 둔감한 사람이었다.

매일매일 돈에 쫓겨 산다는 정욱은 삼시세끼 고기반찬을 챙겨 먹었는데 그는 식사가 끝나도 양치는 한참 뒤에 한다고 했다.

B가 이유를 묻자 그는 반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입안에 남은 맛있는 맛의 여운을 좀 더 즐기고 싶은 거야"

정욱은 40이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자신의 힘으로 번도 돈을 벌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 역시 모 명문대를 나온 작가였는데 그녀는 그런 아들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다.

B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또한 사람의 한 모습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동네에는 수년간 동네를 떠돌아다니며 동네사람들의 사람들의 동정과 관심을 받는 떠돌이개<이브>가 있었다.

이브는 동네를 떠돌며 초딩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동네 슈퍼에서 개껌이나 통조림을 하나 얻고 고깃집에서 뼈다귀를 얻어 먹곤 하는 늙은 개였다.

B는 어쩌면 동네에서 유일하게 이브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무기력한 모습으로 꼬리를 흔들어 생명을 연장하는 이브의 모습을 보노라면 B의 맘속에는 가끔씩 가벼운 짜증이 치밀어 오르곤 했다

은희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이브를 씻겨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은희의 가게앞에 머물렀다.

"내가 낯선 이 동네에 와서 빨리 사람들을 사귀는데 이브가 도움이 됐어.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브를 보살펴주고 그래서 나를 따르니까 사람들도 나를 좋게 보고 그런 사람들과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거야."

B는 은희와 정욱커플과 이브 어딘가 많이 닮아 있다고생각했다.


은희는 음색과 가창력 하나는 흠없이 좋았는데  무능력은 엉망이라 일은 잘 벌이지만 수습은  안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맘이 내키는 대로 50평이나 되는 가게를 음악 교습학원을 운영해 보겠다면 추가로 얻었는데 수습할 능력도 안되고 자에게 맡길만할 자금도 모자란다는 이유로 반년이나 월세만 내며, 그 큰 상가를 고작 온갖 잡동사니를 처박아 두는 창고로 쓰며 방치해 두고 있었다.

남친과의 생활비외에도 대책없이 돈을 쓰는지라 금전 상황이 어렵다는 그녀는 월세까지 쓸데없 지출을 하고있었.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꼴을 계속 기에 답답했던 B는 자기 돈을 빌려주기로 하고 직접 자재를 사다 날라서 직접 인테리어 공사를 해 는 희대의 뻘짓을 하기에 이렀다.

처음 작업을 시작하던 날.

남자 친구 정욱은 가죽재킷에 손을 찔러넣고 담배한개피를 손에 든채.

장갑을 끼고 어마어마한 잡동사니를 모두 상가 밖으로 빼고 있는 B의 작업을 반대했다.

"B야 그건 쓸데없이 일을 하는 거 같아. 그냥 작업할 곳만 치우고 작업하는 게 맞아.이쪽으로 조금 밀어놓고 빈곳을 작업하고 그걸 반복하는거지.그럼 그렇게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된다구"

B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형 철거할 때 한 번씩 한 번씩 수십 번을 옮겨서 치우고 다시 미장할 때, 페인트 칠 할 때, 타일 붙일 때, 목공 할 때 때마다 다시 수십 번씩 치우면 몇백 번을 이 잡동사니 치우는데 시간을 써야 하는데  그건 안돼요."

하지만 정욱은 끝내 자신의 주장을 했다.

B는 내심 한번 직접 경험해 보라고 생각하고 내버려 두었하루 동어리석은 헛고생만 한 정욱은 비로소 B의 의견 따랐다.

천장의 텍스를 철거할 때도 정욱은 내내 방해가 되었다.

한대뿐인 전동드릴을 독점한 그는 천천히 온갖 안전장구로 무장하고 고소 작업대로 올라가 피스 구멍 하나 찾는데 한---참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피스를 빼다가 드릴을 미끄러뜨리다가   피스 구멍을 찾다가 놓치가..

1분도 안 걸릴 일을 10분씩 하고 있었다.

B는 인내심을 한시간정도 발휘하다가  끼어들었다.

"형 목 아플 텐데 좀 쉬어요. 제가 좀 할게요"

파스스--때마침 쏟아진 석고가루를 장발 머리에 온통 뒤집어쓴 정욱 오후 햇살을 받아 부스스 날리는 석고가루를 아랫입술을 내밀어 후 불면서 아주 느린 속도로 드릴을 고소작업대에 놓고 천천히 허리를 펴고 느릿하게 머리를 털고 어깨와 가슴을 털고 아주 아주 느린 속도로 보안경을 벗더니 아주 아주 느린 어조로 물었다.

"어...? 왜 그래..? 내가 하는 게 좀... 션찮아 보여?"

오냐! 시원찮아 보이다 마다!

B는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꾹 참고 답했다.

"설마요. 형 목 아플까 봐 그렇죠."

정욱은 끝내 일을 하려 들었고 B는 '이런 단순노동'따위는 자기같은 노동자가 하는게 맞다고 달래가며 어렵사리   한대뿐인 전동드릴이란 아이템을 확보할 수 있었다.

B는 빠른 속도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몇 시간쯤 지나서 작업이 끝났을 때에서야 정욱이 내내 일을 하지 않고 있었고 지금도 무척 마음이 상한 표정으로 복도에 나가 담배만 피워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구석에서 한가하게 고양이와 놀면서 마스킹 테이프를 바르고 있던 은희에게 묻자 "뭔가 마음이 상했나 봐" 답했다.

B는 정욱에게 가서 왜 그러냐고 물었고 몇 번인가 망설이던 정욱은 머뭇거리다가 가죽재킷을 여미며 답했다.

"화난 게 아니라 복로 네가 일을 너무 잘하니까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그래.. 은희가 날 뭐라고 생각하겠니? 꼭 그렇게 일을 막 해야겠어?"

B는 속으로 입을 딱 벌리고야 말았다.

다음 날도 정욱은 B의 작업계획에 반대표를 던지고 말도 안 되는 방식을 고집 타일을 엉망으로 붙여 버렸다.

정욱 맘대로 타일을 붙이는데 세명의 노동력을 하루 종일 투입하고, 뜯는데 자신의 시간을 하루 더 쓰게 된 B는 그 순간부터 정욱의 의견은 모조리 묵살하기로 맘먹었다.

아내는 자기 앞가림도 않으면서 오지랖을 발휘한 B에게 말없이 눈총을 주고 있었고 실제로 B의 시간은 그렇게 가치 없이 낭비할 수 있을정도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B는 주제넘은 오지랖에 스스로 떠맡은 남의 일을 빨리 끝내기 위해 새벽부터 혼자 나가서 일을 했다.

매일 아침에 8시에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늦은 오후나 해가 다 져서야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나 변명을 주워 담는 두 커플은 있으나 마나 한 전력이었는데 신비하게도 해만 지면 동화 구두 공방의 난쟁이들처럼 일과를 끝낸  무리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요정처럼 막일들을 도와주었다.


그중에서 가장 도움이 된 것은 밴드의 드러머 성준과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고 돌아온 길이라며 등장한 엄청난 허벅지를 가진 건장한 문학청년 상우였다.

주변인들의 말에 의하면 은희의 일을 가장 많이 도와주어 온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바로 이들이었다.(자본금을 댄 제임스가 첫 번째, B는 네 번째 사람이었다)

드러머 성준은 아주 젠틀한 태도와 멋진 외모, 거기에 더해 명문대 출신다운 지성도 겸비한 남성이었고,

소설을 쓴다는 문학청년 상우 어딘가 음울해 보이고 조용했다.

성준은 음악에 모든 것을 건 청년이었는데 그 자신도 상당한 수준의 보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희의 음색과 가창력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상태였다.

B는 성준에게 주중에 스케줄이  비는 3일간은 새로 오픈하게 될 자신의 가게 일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고 성준은 흔쾌히 허락했다.

B의 분투덕에 공사를 끝내고 교습소가 완공된 날.

B는 은희에게 그 소식을 전하며 그의 도움을 받게 되어 기쁘다는 소감을 전했는데 그녀는 B의 기쁨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 드러머가 같이 일하는 게 대체 뭐가 좋은 거야?"

그래서 B가 답했다.

"레스토랑 손님의 대부분이 누구야? 여성이지. 근데 성준이는 성격 좋고, 태도나 어조도 고상하고 신사적이지 외모도 좋고 성실한 데다가 일도 잘하는데 영어도 잘하니 외국인들 상대하기도 좋단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은희는 바보 도 터지는 소리를 몇번 내 뱉더니 3년이나 한 호흡으로 밴드를 한 성준에 대해서 처음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된 듯한 표정으로.."아....?? 그런가?" 하더니 눈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는 음악교습소도 여자들이 많이 오는 편인데.."


그런데 며칠 뒤 오픈 기념 파티를 한다고 사람들이 몰려든 장소에서  성준이 B를 찾아 와서 이야기했다.

"형 미안하지만 약속은 못 지키게 됐어요. 원래 비었던 3일 중 2일은 은희 누나가 합주 날로 정했어요. 저는 밴드가 제 인생의 전부라.. 합주가 우선이에요. 여전히 비는 하루는 일해 드릴 수 있어요"

B는 의아했지만 속으로 묻어 두고 한편으론 사양했다.

사람들이 모인 테이블로 나와서 앉아 있노라니 은희가 잔을 들고 B에게로 와서 새로운 계획을 전했다.

밴드원 5명에게 권리금 조로 자신이 가게를 운영하는 기간동안 만든 개인적인 빚까지도 나누기로 했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은 교습소에서 원장 역할이 아니고 밴드원들이 각자 개인사업자처럼 알아서 교습생을 구해야 하는데 이미 모집된 기성 교습생들은 자신이 혼자 모은 거니 독점할 건데 교습소 운영비는 또 각출하겠다는  것이었다.


B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며칠 전 내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드러머의 이용가치를 재발견하고 수를 쓴 것이란 것이 첫 번째였고,

자신이 남자 친구와 대책 없이 생활하며 지게 된 빚까지도 밴드원들에게 나누려는 은희가 지금까지 인지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고 그녀의 시도가 간교하다는것이 그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조금 실망스러울 뿐이었지만

두 번째는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같은 음악을 하는데 인생을 걸고 임하는 타인을 금전적으로 기망하려는 행위는 사악하기 그지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B는 그 순간 마음속으로 손절을 선언했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자금줄이 되어주었던 제임스를 찾아가 이 사실들을 전하고 계획에 동의했다는 밴드원들을 은희의 나쁜계획으로부터 구할 방법을 공모했다.

제임스는 바로 드러머 성준을 불렀고 은희의 기만과 거짓을 알려주고 이야기의 앞뒤를 맞춰보았다.

특히 은희가 나누려는 빚이 정욱과 은희의 개인적인 빚일뿐이고 교습소에 들어간 자금의 대부분은 제임스의 것임을 알렸다.

그런데 B가 사라지고 얼마 뒤 성준이 자리를 비운 것이 불안했는지 은희가 B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오빠 성준이가 못하게 돼서 어떻게 해. 우리 밴드원들 시간을 맞춰보니 그렇게 되더라고.. 오빠 곤란할까 봐 내가 상우한테 이야기했더니 자기가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화해 봤어"

옆에서 문학청년 상우의 당혹스러운 만류가 들렸다.

"아니 누나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그냥 그 형 아이디어가 재밌는 것 같다고 했을 뿐이지.."   

은희는 상의 말을 자르고 전화를 대뜸 바꿨고 B는 내친김에 상우까지 만나 같은 이야기들을 전했다.

그렇게 수년 동안 그녀에게 가장 도움을 많이 줬다는 네 사람은 한순간에 그녀에게 마음이 떠났다.

B는 옷깃에 뭍은 도깨비풀을 떼어내듯 은희와의 인연을 끊었다.


뜻밖에도 3년넘게 이어진 그녀의 밴드가 해체되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한 달지나기 전에 은희를 제외한 나머지 밴드원들이 새로운 밴드를 만들었다.

제임스는 은희에게서 돌려받은 자금을 성준에게 다시 투자했고 성준은 자신의 교습소를 열게 되었다.

B는 성준이 대신 상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B는 은희가 성준이 대타로 뛰라며 상우의 등을 떠민 다음날 아침에 동네 카페에서 상우를 만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고 그의 의사를 물었다.

잠시 동안 고민을 하던 상우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은 내내 단단하게 닫혀 있던 입을 열어 같이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1년간 자전거 한대로 전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라 상우는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오겠노라며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의 집이 있는 수원으로 떠났다.


만화 3x3eyes


2. 민들레 홀씨같은 상우


상우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전영록이 썼을법한 커다란 빈티지 안경을 늘 쓰고 다녔는데 가수 김범수를 닮은 각진 하관에  헤어스타일이나 이미지는 90년대를 풍미한 판타지 만화 3X3 EYES의 주인공 야크모를 닮아 있었다.

김범수를 닮은 하관을 가진 까닭인지 왠만한 보컬 뺨치게 노래를 잘 불러서 에릭베넷이나 맥스웰같은 r&b가수들의 노래나 나얼의 노래도 손쉽게 불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노력도 하지 않았고 재능을 키워 볼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항상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필립 K. 딕의 책을 들고 다녔고  염세주의자를 자처했는데 그래서인지 글 쓰는 행위 이외에는 삶에 대해 별다른 의욕이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전공인 문학과 거리가 멀게도 모든 종류의 요리 자격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경력도 외식업계에서 쌓아왔는데 훗날 자식과 함께 식당을 하는 게  꿈인 엄마를 위해서라고 했다.

상우의 엄마는 15살에 그를 낳았다.

엄마와 동갑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늘 술독에 빠져 살았고 상우와 그의 동생 그리고 어머니를 시시때때로 폭행했다.

십수 년을 그렇게 자식과 함께 맞고 살던 그의 어머니는 어느 새벽 자식들을 위해서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아버지  몰래 자식들과 함께  보따리 하나만 싸 들고 도망쳤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고 다시 십여 년을 헌신했다고 했다.

아마도 그의 우울해 보이는 얼굴과 아우라처럼 그를 둘러싼 그림자는 거기서 비롯되었것이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늘 상우를 지배하고  있었나보다.

한날은 아침에 눈을 뜬 상우가 무척 상쾌해 보였다.

그는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내내 웃음을 띤 얼굴이었다.

"오늘 아침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뭔 좋은 꿈이라도 꿨어?"B가 묻자 상우가 대답했다.

"아버지가 꿈에 나왔어. 내가 아버지 나오는 꿈을 자주 꾸거든.. 아버지가 나오는 꿈은 항상 가위눌림과 같아. 꼼짝도 못 하고 당해야만 하거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어젯밤에는 아버지 두 팔을 붙잡고 꼼짝 못 하게 만들어버렸어. 그리고 크게 소리쳤. 우리 좀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꺼지라고 말이야.그런 꿈은 처음 꿔봤어.그래서 너무 기분이 좋아."

이 말은 오래도록 B의 기억속에 남았다.


한편 B는 지인이었던 인테리어 업자로부터 크게 뒤통수를 맞아 분식집보다 못한 식당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자금사정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인테리어 업자에게 남은 돈을 다 갈취당해 버렸던 터라 모든 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한 푼이 아쉬웠던 B는 양념 선반이 필요해도 살 돈이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찾아오지 않다시피 하는 가게라 B는 가게 뒷골목에서 인테리어 업자들이 버린 후 치우지도 않고 간 폐목을 몇 개 연결해서 양념 선반을 만들었다.

망치와 못만으로 설피 만든 삐뚤빼뚤한 양념 선반을 가지고 들어와 닦고 올리브 오일을 바르고 선반 한에 놓자 그걸 본 상우가 다가왔다.

그는 평소에는 늘 힘이 빠져 있 가느다란 눈에 이글거리는 분노를 담아 B에게 물었다.

"형 그거 당장 갖다 버리면 안 돼?"

"왜? 일할 때 필요해. 지금 당장은 한 푼이 아쉬워서 한동안은 이걸 써야겠어. 이거 하나 살 돈이면 아르바이트 네시간 시급을 지급할 수 있다."

상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냥 갖다 버려. 새 거 사. 내 월급에서 까고 새거 사고 그건 당장 갖다 버리란 말야."

B는 상우의 월급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당장 쓸 수 있는 자작 선반을 갖다 버리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던지라 거절했는데 기가 차게도 상우는 B가 보는 앞에서 선반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쓰레기통에 버리려 했다.

B는 마침내 화가 나 상우와 다투고 그걸 다시 빼앗아 창고 선반 한편에 어정쩡 방치해 두었다.

몇 시뒤에서야 상우가 B에게 사과를 하며 자신의 감정을 전했다.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종종 맡겨지곤 했어. 동생과 내가 밖에서 놀다가 들어오면 집에 모래나 검불 따위가 묻어 들어왔겠지.

할머니는 그건 늘 손바닥으로 쓸었어. 늙고 주름진 굳은살이 가득한 손으로 비닐장판 바닥을 쓸면  -싹-그런 거친 소리가 나는 거야. 고작 몇천 원이면 빗자루 하나를 살 텐데 할머니는 늘 손바닥으로 방을 쓸었어. 형이 만든 선반이 마치 그 손바닥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켰어. 그 선반은 내게 할머니의 손바닥이야. 난 그런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았어."

B는 더 따지지 않고 그 길로 창고에 어정쩡 히 방치되어 있던 선반을 직접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B가 모래는 손바닥으로 쓸어야 깨끗이 쓸린다는걸 알게된건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고 아이들에 뭍혀 들어온 모래를 매일매일 치우게 되었을때였다.상우의 할머니는 상우형제때문에 손바닥으로 쓴 것이었다.)


가게에는 종종 돈을 구걸하거나 아무 가치도 없는 물건을 비싸게 팔려고 드는 잡상인들이 드나들었는데 그중에서 다리를 심하게 저는 사람이 한분 계셨다.

하루는 그들 못지 않게 형편이 어려운 B가 어렵게 거절하고 돌아서는데 상우가 달려가서 "수세미 하나 주세요" 하고주머니에 있던 지폐 수십 개를 그분에게 건네주더니 잔돈 필요 없으니 다 가지시라며 돌아섰다.

얼핏 봤을 때도 오만 원과 만 원권이 여러 장 있어 대충 봐도 몇십만 원은 되어 보였는데 그걸 보지도 않고 건네주는 게 황당해서 그게 얼마인지 아느냐고 묻자 상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얼만지 모르고 관심도 없어. 나한테는 필요 없고 저 사람에겐 필요하니까 돈은 그저 있어야 할 곳으로 간 거야"


그런 상우와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동안 B는 두어 번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갔고 셀 수 없는 마음고생을 했다.

B는 비자에게 무결점의  최선과 을 다해,  한접시 한접시 신뢰를 쌓아나가는 것만이 자신에게 닥친 여러 가지 불행을 벗어던지는 유일한 길이라 믿고 매진하기 시작했는데 상우는 B의 이 태도를 견디지 못했다.

어느  상우가 만든 음식이 성에 차지 않았던 B는 음식을 다시 만들 것을 지시했는데 상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하고 다시 접시를 서버에게 건넸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손님도 모르고 새로 만들어서 차이가 생긴다 해도 누구도 인지할 수 없어요"

B는 다시 접시를 빼앗았다.

"아무도 모른다는 건 그저 네 생각이야. 또 아무도 모른다 한들 적어도 나는 알아. 다시 만들어 줘"

상우는 같은 주장을 반복했고 B도 강경하게 다시 답했다.

"안돼! 손님에게  절대로 허술함을 보없어. 그 허점이 나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거야"

마침내 상우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외쳤다.

"아니! 그럼 여기가 전쟁터고 이 한 접시가 총알이라 한발 잘못 맞으면 죽는다는 거야? 난 그런 식으론 일 못해"

B도 분노에 차서 답했다.

"그래 전쟁터다 이 새끼야. 너는 아닐지 몰라도 나한테는 여기가 전쟁터고 이 한 접시는 총알이라 한발 잘못 맞으면 나는 내 마누라하고 같이 뒈지는 거야."

상우는 딱딱하게 굳은 인상으로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주방문을 나섰다.

"형 어디 가요?"다른 직원이 무안한 표정으로 붙잡았자 상우는 "집에가요." 답하고는 자전거 타 수원으로 내려갔다.

다른 직원들이 붙잡지 않을 거냐고 물었고 B는 붙잡지 않을 거고 상우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일해야 한다고 알렸다.

정말 상우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뒤. 마음이 약해진 B가 몇 번이고 연락을 했지만 그는 연락을 받지도 않았고 찾아간 고시원은 이미 방을 뺀 지 오래다.


"자기 일이 아닌데 자기 일처럼 생각해서 너무 부담이 되었던 걸지도 몰라"  

아내는 상우가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B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데 그래서인지

B는 수년 동안 상우를 잊지 못했다.

자신이 어려울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고마움과 자신의 일처럼 생각해주려 든 그 마음과 상우의 얼굴과 표정들, 그리고 그의 어두운 면모와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시리곤 했다.

가끔은 전화도 해 보았지만 상우는 묵묵부답 일체의 연락에 응하지 않았다.

미련한 B와 달리, 상우는 주머니 속의 돈에도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것처럼 타인에게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았나 보다.


년 뒤 다른 지인의 SNS를 통해 우연히 보게 된 상우는 예의 그 커다란 빈티지 안경을 쓰고 허리까지 기른 긴 머리를 휘날리며 또 그렇게 다른 누군가의 꿈에 가볍게 뭍어 살아가고 있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흩날려 누군가의 꿈 여기저기를 스쳐 지나가며 살아가고 있 그 모습에 살짝 안도감을 느낀 B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작년 어느 밤. 우연히 들리게 된 수원의 밤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신호를 기다리던 B는 건장한 체구, 커다란 빈티지 안경에 허리까지 오는 장발의 남자를 우연히 발견했다.

남자는 특유의 성큼 걸음으로 B의 우측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엇!??"

상우의 모습과 똑같은 사람을 보고 B는 놀랐다.

"상우야"부르면 뒤 돌아볼 것 같았다.

골목으로 그를 쫓아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상상을 찰나 지간 했다.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불러 봤을지도 모른다.

쫓아가서 상우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B는 그러지 않았다.

상우면 어떻고 아니면 또 가..

이미 끊어진 인연이고, 다시 이으려 시도해 봤을때 실패했고,

이젠 두번 다시는 이어지지 않을 인연일 뿐데..

이내 고개를 돌리고 스로틀을 당겨 신호가 바뀐 밤거리를 없이 달려갔다.

그때 B는 과거에 대한 기억의 일부로부터 그렇게 영원히 떠났다.

두 번 다시 너를 궁금해하는 일은 없으리라.

희미하게 남겨져 있던 미련의 잔재가 온몸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등 뒤로 흩날려 사라졌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위험하게 하는 도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