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의 빈자리를 채웠던 것들
축하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어떤 케이크를 살지 고민한다. 예전에는 대형 프렌차이즈 빵집의 케이크로도 충분히 만족했지만, 맛있기로 유명한 개인 빵집의 케이크를 몇 번 먹고 나니 맛의 기준이 높아져 버렸다. 자고로 맛있는 케이크란 시트는 적당히 촉촉해야 하고–대형 프렌차이즈 빵집의 경우 빵이 퍼석한 경우가 많다-시트지를 감싸는 생크림은 입안에 들어간 순간 빵과 어우러지며 녹아 퍼지는 느낌을 연출해야 한다. 내 입에 딱 맞는 케이크를 만드는 동네 빵집을 찾아 정착했건만 최근 이사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별하고 새로운 가게를 찾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기념일을 앞두고 케이크가 맛있다고 유명한 가게의 후기를 열심히 읽으며 특별한 날의 주인공과 어울리는 맛과 모양의 케이크를 신중하게 골라 본다. 내 생일이 있는 봄에는 딸기 케이크, 달콤한 걸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선 초코 케이크,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에겐 티라미수 케이크, 특별한 기억을 선사하고 싶은 부모님께는 망고 케이크, 기분 전환을 위한 기념일에는 꾸덕꾸덕한 치즈케이크 등 마치 소믈리에가 된 것처럼 상황에 맞는 다양한 케이크를 선별한다.
케이크는 특별한 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화룡점정 같은 존재다. 배가 불러도 손이 저절로 가는 맛난 케이크는 행사의 하이라이트기 때문이다. 기념일을 축하하는 맛있는 식사 후, 기대보다 덜 촉촉하고 덜 부드러운 케이크를 먹을 때면 특별한 날을 덜 챙긴 기분이 든다. 더불어 초에 불을 붙이고 불을 끈 후 촛불의 희미한 빛에 집중하며 노래를 부르고 초를 끄는 행위는 예쁘고 맛있는 케이크 위에서 일어나야 완벽하다. 나는 왜 이렇게 케이크에 집착하게 된 걸까.
초등학교 입학 후 처음 맞이하는 생일을 앞둔 봄이었다. 생일이 특별한 날이란 사실을 인식하고 멋진 이벤트를 기대한 최초의 생일이었던 만 7번째 생일날, 나는 꼭 생일상 위에 올라간 하얀색 케이크를 ‘보고’ 싶었다. 빵집도 더불어 케이크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이전에 케이크를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 ‘먹고 싶었다’라는 표현보다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케이크가 내 생일상에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부푼 기대 속에 드디어 생일이 찾아왔다. 동네 친구 집에서 열심히 놀다 저녁을 먹기 위해 돌아온 우리 가족이 살던 단칸방에서 맞이한 생일상에는 맙소사. 케이크가 없었다. 대신 초코파이를 쌓아 만든 케이크를 앞에 두고 엄마 아빠가 나를 반겨줬다. 부모님의 환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나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도 초에 불을 붙이고, 생일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끄는 주인공이 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하얀 생크림이 아닌 짙은 갈색 초콜릿 코팅을 밝히는 촛불에 만족하며 나는 ‘후’하고 불을 껐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아직도 그날이 기억나는 걸 보면 어린 나는 그 일이 아주 서운했나 보다.
그 후 우리 가족은 단칸방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파트 상가에는 새로운 이사 온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가게가 속속들이 입주했는데 가장 좋은 코너 자리에 빵집이 생겼다. ‘라몬트 베이커리’라는 이색적인 이름을 가진 이 빵집의 진열장에는 항상 대여섯 개의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두 살 터울의 동생과 나는 상가를 갈 일이 생길 때면 돌아오는 길에 꼭 빵집 앞에 서서 유리 진열장에 있는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진열장에 놓인 케이크는 화려했다. 가장 자주 볼 수 있었던 장미 케이크는 시트지를 하얀 크림으로 감싸고 그 위에는 연초록색 잎을 단 분홍 장미들이 중앙을 장식하며 화려한 모양새를 뽐냈다. 케이크의 가장자리는 화려한 크림장식이 꽃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장미의 옆에는 체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설탕에 절인 빨간 젤리가 포인트로 놓여 있었기도 했다. 케이크의 크기가 커지면 위에 놓인 꽃의 개수가 늘어났다. 장미 케이크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과일 케이크도 있었다. 설탕에 절인 여러 종류의 과일들은 케이크의 크기에 따라 여러 조각으로 구획을 나누며 케이크 위를 빼곡하게 채웠다. 동생과 나는 빵집 앞에 서서 케이크를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 생일에는 어떤 케이크를 먹을지, 어떤 케이크가 여기서 제일 멋있는지, 가장 큰 케이크는 몇 명이 먹을 수 있을지 등 어린아이가 케이크로 할 수 있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진열장 속 수많은 케이크 중 하나가 우리의 어느 특별한 날 등장하길 바라며 어린 나와 동생은 케이크를 보는 것만으로도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내내 생일날 케이크가 상 위에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케이크 대신 롤케이크가 주로 주인공이 되었는데 이것도 맘모스빵 위에 초를 꽂자는 엄마를 겨우 설득해 얻은 대안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같은 동네에 살던 사촌 동생의 생일날 진열장에서만 보던 케이크를 드디어 맛볼 수 있었다. 기대가 커서였을까, 처음 먹어본 케이크는 상상만큼 맛있지 않았다. 요즘처럼 촉촉한 생크림이 아닌 묵직한 버터크림이었기 때문에 입안에서 크림이 사르르 녹는 느낌이 없었다. 상상만큼 환상적인 맛은 아니었지만, 축하의 순도를 높여준다는 케이크에 대한 나의 상징적인 기대치는 여전히 높았다.
대형 프렌차이즈 빵집들이 줄지어 생기고 케이크에 대한 인식이 예전보다 대중적으로 바뀌고,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우리 가족의 생일상에 케이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훌쩍 지난 요즘에서야 내 생일날 케이크가 없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느낀다. 시골에서 자란 엄마에게 케이크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고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 생일날 고기를 사면 고기를 샀지 케이크를 살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케이크는 단지 생일 초를 꽂아두는 받침대에 불과하단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케이크에 대한 아쉬움이 차곡차곡 쌓였던 건지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후 가족의 생일날에는 케이크를 빠뜨리지 않고 샀다. 묵직한 케이크 상자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통해 내가 꿈꾸던 삶의 모습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케이크만 있어도 좋을 것 같은 시절이 지나 이제 맛없는 케이크를 먹으면 슬퍼질 정도로 나의 세상은 바뀌었다. 시장에서 오천 원짜리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칠천 원짜리 망고 케이크 한 조각을 포장해 오는 사치를 부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케이크가 나에게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통닭 두 마리 값의 케이크를 고민 없이 살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지만, 어느 날 문득 일곱 살을 축하하던 단칸방의 초코파이 케이크가 생각날 때가 있다. 내가 아이를 낳고 나서야 집에 돌아올 딸을 기다리며 초코파이를 쌓았을 부모님의 마음이 보인다. 케이크 진열장에 서서 동생과 펼쳤던 상상의 순간도 기억한다. 여전히 나는 케이크에 집착하지만, 케이크가 없던 자리를 채웠던 것들을 이제서야 알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