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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햇살 Jul 04. 2024

『맡겨진 소녀』서서히 몰려오는 감동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




▶책을 읽게 된 계기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를 알게 된 건 이동진 평론가의 추천 덕이었다. 이동진 평론가의 추천 도서 중 소설은 꽤 취향이 맞는 편이라 관심이 생기면 찾아 읽는 편이다. (반면 논픽션은 취향이 맞지 않아서 몇 번 실패한 경험이 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리라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현재 참여하고 있는 영어원서 독서회의 선정 도서가 되어 반강제적으로(?) 원서 읽기를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얻고 싶었던 것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은 이후 얇은 분량의 소설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내용은 짧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읽어야 할 것 같은 묵직한 이야기를  만나는 경험이 다시 찾아오길 기대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기대치 않은 영화에서 뜻밖의 감동을 느끼듯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모르는 단순한 구조에서 감동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나를 이끈 포인트


1. 차곡차곡 쌓아가는 잔잔한 묘사들


  『맡겨진 소녀』는 주인공이(정확한 이름과 나이는 언급되지 않는다) 여름 방학 동안 외가의 친척에게 맡겨지며 일어난 일상의 이야기들을 풀어나간다. 


 어느 일요일, 주인공 소녀는 미사를 마친 후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집이 아닌 엄마의 고향으로 향한다. 집안 사정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킨셀라 부부댁에서 여름을 보내게 됐기 때문이다. 함께 보낼 친척 부부는 어떤 사람들일까, 지내게 될 집은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며 소녀는 차 안에서 공상에 빠진다.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 주인공은 클로네걸에서 살다 웩스포드의 킨셀라 부부의 집에 가게 된다.


 킨셀라 부부가 사는 웩스포드에서 맞이한 일상은 단순하다. 농장을 하는 킨셀라 부부댁에서 소녀는 보통 킨센라 부인을 도와 자잘한 집안일을 하고 때론 책을 읽고, 오후에는 킨셀라 아저씨가 보는 앞에서 농장을 가로질러 입구에 있는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한다. 이때 아저씨는 달리는 시간을 재며 아이의 빠름을 칭찬하고 소녀는 달리는 시간을 점점 단축해 나간다. 지덕체를 모두 쌓아가는 일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순한 일상에서 소녀는 부부로부터 세세한 관심을 받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매너를 몸에 익힌다.  부부의 작은 관심을 통해 소녀는 서서히 변화해 나간다. 



 부부의 가르침을 통해 소녀는  'yeah'가 아닌 'yes'로 대답하고(킨셀라 부부 집에 오기 전에 소녀는 yeah라고 대답하는데 yeah는 yes보다 가벼운 느낌이다), 제대로 된 옷을 깔끔하게 입고, 글자를 읽기 시작한다. 킨셀라 부부가 작정을 하고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에 아이를 녹이며 제대로 아이를 'foster'하고 있음을 독자는 느낄 수 있다. 



 잔잔한 물결처럼 녹아드는 웩스포드의 일상과 대조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킨셀라 부부의 사랑이 이 아이를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느껴지며 큰 감동이 밀려온다. 익숙했던 고향의 자기 집이 낯선 곳이 되어버린 소녀의 반응을 보며 우리는 한 아이를 키워내기 위해 어떤 정성과 마음가짐이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2. 진정한 양육의 자세


 책 속에서 가장 대조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킨셀라 아저씨(Jhon)와  아빠(Dan)다. 소녀의 아빠는 성실, 정직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보인다.  동네 사람들과 카드 게임을 하다가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소를 팔았고, 돈이 없어 사람을 고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밭에  건초가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다 정리했다며 킨셀라 아저씨에게 거짓말을 한다. 소설 속 소녀의 묘사로 아빠의 부족한 부분이 나타날 때마다 아이의 속 깊음에 놀라는 한편 아빠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소녀가 빈 부분이 보인다.



( 루바브 농사가 잘되었다며 집에 가져가 엄마에게 전해라며 킨셀라 부인이 루바브를 아빠에게 넘기자)


p. 20 아빠가 아주머니에게 루바브를 받지만 아기라도 안은 것처럼 어색하다. 루바브 한 줄기가 툭 떨어지더니 또 한 줄기가 떨어진다. 아빠는 아주머니가 루바브를 주워 건네주기를 기다린다. 아주머니는 아빠가 줍기를 기다린다. 둘 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결국 허리를 숙여 루바브를 줍는 사람은 킨셀라 아저씨다.


p. 14 My father takes the rhubarb from her, but it is awkward as a baby in his arm. A stalk falls to the floor and then another. He waits for her to pick it up, to hand it to him. She waits for him to do it. Neither one of therm will budge. In the end, it's Kinsella who stoops to lift it



 아빠의 어른스럽지 못한 면은 아이가 보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드러난다. 루바브를 줍는 상황에서 세 명이 각자 가진 특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결국 가장 마지막에 루바브를 주운 사람이 킨셀라 아저씨는 소녀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다. 



 소녀가 원래 살던 집과 달리 킨셀라 부부의 집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다. p. 19 하지만 이 집은 다르다. 여기에는 여유가, 생각할 시간이 있다. 어쩌면 여윳돈도 있을지 모다.(p. 13 But this is a different type of house. Here there is room, and time to think. There may even be money to spare.) 처음 집을 방문해 처음 소녀가 느낀 감정 중 하나는 '여유'였다. 어떤 행동에 앞서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아이에게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소녀가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킨셀라 부인은 소녀를 우물가로 데려가 우물을 긷는 법을 알려준다. 우물가로 향하는 동안 느낀 소녀의 감정 또한 인상 깊었다.  



p. 28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p. 22 Neither one of us talks, the way people sometimes don't when they are happy - but as soon as I have this thought, i realise its opposite is also true. 



p. 30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 23 This water is cool and clean as anything I have ever tated it : it tastes of my father leaving, of him never having been there, of having nothing after he was gone. I dip it again and lift it level with the sunlight. I drink six measures of water and wish, for now, that this place without shame or secrets could be my home.



 아이를 양육할 때 직접적인 가르침보다 어른이 직접 보여주는 행동과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킨셀라 부부를 통해 알 수 있다. 소녀가 킨셀라 부부와 있었던 시간이 짧아서 오는 아쉬움보다 그 중요한 돌봄의 경험을 소녀의 중요한 시기 한 부분에 채워 넣을 수 있었음을 상기하며, 이런 따뜻함이 한 인간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 본다. 




3.  Perfect opportinity to say nothing


 '말하지 않을 완벽한 기회', 'Perfect opportinity to say nothing'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다.  소녀는  첫날 킨셀라 부인과 함께 우물가에 갔다가 평온한 분위기에 젖어 둘 다 말이 없어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을 통해 때론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어떤 큰 힘을 가지는 것을 알게 된다. 


p. 73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p. 64 You don't ever have to say anything, he says. Always remember that as a thing you need never do. Many's the man lost much just because he meiss a perfect opportunity to say nothing.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간 소녀는 가족으로부터 환대가 아닌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엄마는 예의 바르게 변한 딸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언니들은 마치 영국에 잘 사는 친척을 본 마냥 소녀를 신기해한다. 여름 동안 많은 걸 배운 소녀는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에게 말할 필요가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p. 96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p.96)

p. 85 'Nothing happened.' This is my mother I am speaking to but I have learned enough, grown enough, to know that what happened is not something I need ever mention. It is my perfect opportinity to say nothing. 



 말을 하는 건 자신의 표현 방법이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침묵 또한 좋은 표현 방법이 되기도 한다. 나의 소중한 사람과 그 사람과의 기억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침묵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음을 소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말 없는 소녀가 되어가는 변화 속에서 (말 없는 소녀는 소설을 원제로 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름을 통해 겪은 소녀의 변화와 성장을 느낀다.




▶책을 읽고 내가 얻은 것


  무척 마음에 들었던 소설이지만 잔잔한 묘사가 대부분이고 흐름을 통해 오는 감동을 전달할 수 없어 글로 정리하며 어려움을 느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누군가를 성장시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고 더불어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인가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던 무렵 2개월 된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임시 보호하게 됐다. 원래 종종 봉사활동을 가던 동물보호센터에 들어온 고양이였는데 아직 어린 고양이라 성묘들과의 분리도 필요하고 사람의 손을 타기 위해 임시 보호를 했다. 잠깐 보호센터에서 놀아주는 게 아닌 내가 사는 공간으로 데려와 5주라는 시간을 돌보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란 걸 가장 먼저 느꼈다. 정해져 있는 내 일상생활 속에 고양이를 돌보는 시간을 집어넣어야 했다. 아직 어린 고양이라 네 끼를 시간 맞춰 먹여야 했는데, 매일 밤 저녁밥을 주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버텨야 했다. 어디 외출하더라고 4-6시간의 식사 텀을 지키기 위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과 같은 숙명이 아닌 내가 자처한 책임감으로 살아있는 개체를 대하고, 내가 하는 행동으로 인한 변화를 지켜보며 때로는 귀찮음, 때로는 행복함, 때로는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 차는 시간들이 오갔다. 그냥 보기에 안락하다 생각하는 환경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며, 좋다는 마음만으로도 책임을 다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할 수 있다면 입양까지 고려하고 임시 보호를 자처한 것이었지만 결국 나는 고양이를 돌려보내기로 결심했다. 



 소설 속 소녀의 부모도 책임을 다하지 않는 부모는 아니었다. 다만 그 정도가 킨셀라 부부보다 부족했고 소녀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빈 곳을 발견했을 뿐이다.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항상 애쓰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 마음이 타인을 향하는 것은 쉽지 않다. 책을 통해 양육이란 무엇이며 바른 어른으로 아이를 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자라야 하는 방향을 먼저 보여주는 어른으로서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어른으로서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


- 잔잔함 속에 감동을 느끼고 싶은 사람

- 긴 소설을 읽기 싫은데 깊은 감동은 느끼고 싶은 사람

- 양육이 어려운 사람

- 생명체의 입양을 고민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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