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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햇살 Jul 12. 2024

[30대의 자아찾기] 국평 아파트

국평 아파트 매수기

  전용면적 85제곱미터, 일반적으로 말하는 삼십 평대 중반의 집을 ‘국민 평형’ 줄여서 ‘국평’이라 부른다. 1970년대 건설촉진법 시행령이 제정되던 시기 대한민국 평균 가구 수는 약 다섯 명이었다. 일 인당 적정면적을 5평으로 계산하고 이를 제곱미터로 환산하면 대략 85제곱미터가 나오는데, 이를 토대로 국민 평형이 정해졌다. 시간이 흘러 강산이 다섯 번 바뀔 동안에도 국민 평형은 살아남았고, 다양한 형태의 가구가 생겨난 현재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85제곱미터의 아파트를 한 가구가 살기 가장 적정한 평균으로 여기고 있다. 결혼 칠 년 차, 우리 부부도 드디어 국민 평형의 아파트 그것도 이제 입주하는 신축 아파트에 입성했다. 


  결혼 전까지 나는 방 두 개, 화장실 한 개인 복도식 이십사 평 주공 아파트에 살았다. 여덟 살에 이사해 서른한 살까지 살았으니, 현재로선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오래 산 집이다. 타향살이하던 부모님이 단칸방 월세살이, 전세살이를 거쳐 청약을 통해 처음 마련한 자가였다. 이삿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화물 트럭 운전을 하던 이모부의 차에 단칸방의 조촐한 짐을 싣고 새집에 도착했다.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짐을 정리하고 중국 음식을 시켜 다 함께 저녁을 먹었다. 예전에 살던 단칸방은 화장실이 따로 없었는데 이사한 새 아파트에는 화장실은 물론 욕조까지 있었다. 사람들로 가득 찬 거실에서 엄마에게 속삭였다. “엄마 나 목욕해도 될까?” 어린 마음에 욕조가 있는 화장실이 너무 좋아 손님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이사 첫날부터 욕조에 물을 가득 채워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반짝이던 새집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울었던 가세처럼 점점 바래졌다. 같은 층에 함께 살던 여섯 가구 중 첫 입주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은 우리뿐이었다. 살수록 늘어나는 살림과 잘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성격이 더해져 집에는 여유가 없었다. 빛바랜 벽지를 바라보며 물건들로 꽉 찬 공간 속에 누워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집은 안락한 공간이라기보다 불편한 공간이 되어 갔다.

 청소년기 내가 가장 좋아했던 방송은 집을 고쳐주는 ‘러브하우스’와 방학 때만 볼 수 있었던 공중파 오전 주부 정보 프로그램에 나오는 집 소개 코너였다. 인테리어를 통해 정리된 공간과 생활하기 편한 쾌적한 동선은 볼 때마다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집과 인테리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으나 집을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내가 해결하기 힘든 문자였다. 평생을 이십 평 혹은 이십 평보다 작은 집을 살아온 내가 결혼을 통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이제 집은 주어진 것이 아닌 내가 만들 수 있는 문제로 바뀌었다.     


  결혼과 함께 남편과 마련한 신혼집은 전용면적 8평의 원룸이었다. “신혼이니까 우리 한 번 놀기 좋은 곳에서 살아보자”라는 의견을 모아 막 입주를 시작한 상업지의 주상복합아파트와 함께 있는 오피스텔의 원룸을 구했다. 오래된 아파트에 적응된 내게 새 오피스텔의 원룸은 크기와 상관없이 펼쳐진 신세계였다. 아파트의 공용공간을 비롯해 집안의 모든 것이 새것이었고 주변엔 여러 종류의 상권들이 즐비했다. 지하철역이 바로 앞에 있어 늦게 올 일이 생겨도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 방 크기와 상관없이 신혼의 맛은 달콤했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기엔 무리가 있었다.

 결혼한 지 일 년, 아이를 갖기로 한 후 다시 부동산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모은 돈으로 누가 봐도 좋은 아파트를 살 수는 없었다. 역세권을 포기하고 신축에 집중하며 부동산을 알아보다 약간 경사진 언덕에 있는 20평대 아파트의 분양권을 매수했다. 초등학교도 멀고 지하철역까지의 거리도 애매했지만 바다가 보이는 뻥 뚫린 경치를 자랑하는 26층의 한 집이 우리 명의의 첫 집이 됐다. 그곳에서 거의 6년을 살며 아이를 낳았고 유치원을 보냈고 새로운 인연들도 생겼다.     


  어느 날 동네 언니가 말했다. “나 집 팔았어. 곧 이사가.” 또래를 키우며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은 아이가 다섯 살쯤 되니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이사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초등학교였다. 이 집의 가장 큰 단점은 배정받는 초등학교가 도보로 가기 힘든 위치에 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자녀가 있는 집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사를 고민했다. 아이와 함께 놀이터를 나갈 때면 여기저기서 이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들려왔고 덩달아 나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어느 날 모두 떠나고 우리만 남을 것 같은 걱정이 마음을 덮쳤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찾기 위한 부동산 미션을 시작했다.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부동산으로 가득 찼다. ‘1주택자 갈아타기’, ‘갈아타기 잘하는 법’, ‘분양권 매수’ 등 다양한 영상이 나를 정보의 세계로 이끌었다. 더불어 네이버 부동산으로 여러 매물을 확인한 후 드디어 남편과 여섯 살 아이를 대동한 부동산 임장을 시작했다. 첫 신혼집이었던 원룸과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아파트가 연이어 들어서고 있었는데 그중 입주를 앞둔 아파트 분양권이 우리의 목표였다. 구조가 좋은 아파트였는데 특히 국평 아파트의 경우 방이 네 개나 되었다. 사지도 않은 아파트의 평면도를 보며 나는 각 방을 어떻게 활용할지 꿈에 부풀었다.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는 현장을 둘러본 후 인터넷에 분양권 매물을 가장 많이 올려둔 부동산을 찾아 들어갔다.

 “예산은 얼마나 되세요?”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부동산 소장님의 브리핑이 시작됐다. 인터넷으론 확인할 수 없었던 자세한 내용들이 소개됐고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소장님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분양권 명의 변경을 위해 필요한 분양 계약금, 확장비, 기타 옵션비, 피라고 불리는 웃돈을 합친 각 매물의 최종 가격을 알려줬다. 내가 원했던 국평 분양권의 중층 이상 매물은 예산을 훌쩍 넘겼고 오 층 이하의 분양권 그중 가장 저렴한 삼층짜리 물건이 그나마 금액적으로 현실 가능성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부동산 고수들은 꼭 중층 이상을 매수하라고 했는데 층을 올라가기엔 우리의 자금이 부족했다.

 예산에 맞춰 좀 더 작은 평수의 중층 이상 분양권을 사려고 하니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해당 평형은 나와 있는 매물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매물은 조합원 소유의 물건이라 초반에 많은 현금이 필요했다. “더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우리는 부동산을 나왔다. 서로 잠시 말이 없어졌다. 아이는 부동산이 지겨웠는지 어서 집에 가자고 난리였다.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인터넷을 뒤졌고, 집에 도착해서는 자금을 정리해 둔 엑셀 파일을 열고 여러 가지 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평 분양권을 사기 위해서는 지금 사는 집이 비싸게 팔리는 기적이 일어나거나 대출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분양권을 알아보며 우리 부부의 사이는 잠시 냉랭해졌다.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남편의 입장과 어떻게든 국평 아파트에 살고 싶은 나의 욕망이 부딪혔다. 이 주간의 고민 끝에 우리는 부동산에서 소개해 준 삼 층 국평 분양권을 다시 알아보기 위해 부동산을 방문했다. 그런데 맙소사, 그 분양권은 그사이 팔렸고 그다음으로 싼 물건은 몇천만 원을 더 줘야 살 수 있었다. 이 주 사이 몇천만 원을 잃은 기분이 들었고 나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이제 결정의 기로에 놓였다. 더 고민할 것인가 그다음으로 싼 분양권을 매수할 것인가. 고민을 잠시 미루기 위해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남편이 말했다. “너 표정을 보니 지금 이거 안 사면 평생 나를 원망할 것 같아. 우리 대출을 더 받고 사자.” 밥을 다 먹고 부동산을 다시 찾았다. 일사천리로 우연히 근처에 있던 매도자가 부동산을 방문했고 최종 합의를 통해 계약금을 송금했다.     


  분양권을 산 건 4월, 입주는 9월부터 시작. 이제 5개월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팔아야 했다. 주말에 분양권을 계약하고 월요일에 바로 아파트 상가의 부동산에 매물을 내놓았다. 일주일 흐른 후 나는 깨달았다. 선매수 후매도는 피 마르는 일이란 사실을. 당시 살던 20평대의 집은 그 아파트의 RR(로열동 로열층)라 내놓기만 하면 금방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3개월 동안 아무도 집을 보러 오지 않았다. 나의 불안은 쌓여가고 매도만 생각하면 잠이 안 오기 시작했다.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바뀌었다. '집 잘 파는 법', '매도 팁', '선매수 유의점'으로 말이다. 분양권을 사고 나니 갈아타기 영상에서 꼭 집을 팔고 이사할 집을 사라고 한 조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항상 늦게 발견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당겨졌다.

 조급한 마음에 주변 부동산 열 곳 넘게 연락하고, 부산 전체 매물을 다루는 부동산 소장님들에게도 연락을 돌렸다. 신발장에 가위를 두면 집이 잘 팔린다는 말에 살포시 가위를 숨겨놓기도 했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결국 두 달 후 매도 가격을 이천만 원 내렸더니 사람들이 집을 보러 오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 달,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생겼는데 산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집 보러 온다는 말에 집을 깨끗하게 치우고 방향제를 뿌리고 에어컨을 틀어 놓는 일도 슬슬 지쳐갔다. 그 와중에 첫 방문부터 금액을 좀 더 깎아주면 바로 계약금을 보내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 가격에는 팔 수 없다고 말했으나 그 뒤로도 두 번이나 집을 더 보러 왔다. 슬슬 지쳐가던 무렵 이제 부동산 비수기라는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그 사람이 세 번째로 집을 보러 와 네고를 요청한 날 고민 끝에 부동산에 전화했다. “오늘 계약금 보내주시면 원하시는 금액으로 팔게요” 그렇게 이사 두 달을 앞두고 드디어 집을 팔았다.     


  이제 집도 팔았겠다. 나의 관심은 새집으로 이사 가는 날에 초점이 맞춰졌다. 새집은 분양하던 시절부터 내가 살고 싶은 구조를 가진 아파트였다. 결국 청약 당첨에 실패하여 그림의 떡이었지만 돌고 돌아 우리 집이 되었다. 입주를 한 달 반가량 앞두고 치러진 사전점검을 하던 날의 설레는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줄자와 고무망치, 메모지를 들고 이곳저곳 점검하고 사이즈를 쟀다. 장소마다 어떤 가구를 배치할지, 어떤 커튼을 달지, 어떤 입주청소업체를 선택할지, 줄눈은 하기로 결정했는데 조명이나 탄성은 어떻게 할지 등등 고민과 결정의 연속이 닥쳐왔다. 누군가에겐 번거로운 일이겠지만 이사를 꿈꿨던 나에게는 설레는 일이었다. 달력에 이사 일정을 빼곡하게 채우고 주말이면 새집에 둘 가구를 보러 다녔다. 아이는 부동산에 이어 가구 매장을 가장 싫어하는 장소로 꼽게 됐다.     

  처음 이사 온 날 이렇게 큰 집이 내가 사는 집이란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예전에 살던 집과 비슷한 구조였지만 모든 장소가 조금씩 더 커졌다. 특히 거실과 주방은 1.5배 정도 넓어졌다. 늘어난 집의 크기만큼 대출도 배로 늘어났지만 그래도 좋았다. 외식할 여유는 사라졌지만 집에서 즐기는 여유는 늘었고 공간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컸다. 국평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어른이 되고 내가 한 선택 중에 가장 비싼 선택이었다.


 이사를 하고 한 달쯤 된 어느 날 아침, 한 가족과 마주쳤다. 내 또래의 부부와 내 부모님 뻘 연령대의 부부로 구성된 무리는 그날 이사를 오는지 잔짐을 들고 아파트를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그중 60대로 보이는 남자분이 밥솥을 들고 계셨는데 아무래도 이사할 때 밥솥이 가장 먼저 집에 들어와야 잘 산다는 믿음 때문에 따로 짐에서 빼내 들고 오는구나 싶었다. 그분의 표정이 참 인상적이었다. 무거운 밥솥을 들고서도 새 아파트에 이사온다는 기쁨 때문인지 얼굴에 웃음이 만연하게 띄고 아파트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설렌 걸음을 걷고 있었다. 다른 가족들도 종이백과 박스에 든 가벼운 짐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는데 표정이 밝았다. 아파트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짓는 사람들을 보며 도대체 집 특히 새 집은 무엇이길래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걸까 생각에 빠졌다.

 새로운 공간을 얻는 것은 인생에 대한 보상과 같다. 나의 경우 국평의 집에 사는 건 내가 평균의 삶을 잘 해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이사 후 예전보다 자주 청소하고 자주 공간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다 때론 한 번도 이십 평대의 집에서 벗어나지 못한 친정엄마에 대해서 생각한다. 집을 가꿀 때면 다양한 소품으로 집을 꾸미던 젊은 시절의 엄마가 떠오르곤 하는데 그때 엄마가 느꼈을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새집에 살며 행복한 마음과 동시에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러다 '나라도 잘 사는 게 엄마한테 좋겠지'라고 애써 마음을 돌린다. 국평에 살게 되니 이제 더 큰 평수의 아파트가 부러워진다. 거실이 커지고 나니 아이 방도 더 커졌으면 좋겠다 싶다. 큰 공간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지지 못했기에 품어 본 적 없는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어른이 된 후 어릴 적 갖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 마음이 뻗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숨어있는 나의 또 다른 욕망은 무엇일까. 다시 나의 어린 날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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