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과의 동거 결말
시어머니와의 동거 2탄을 발행하며, "혹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실까요?"라고 호기롭게 적었건만, 서랍에 고이 넣어둔 글을 다시 꺼내 이어 쓰기까지 몇 주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날 것의 내 마음의 정체가 궁금하여 그 마음을 들여다보다가 화들짝 놀라 자꾸만 도망치는 과정을 되풀이해야만 했다.
어머님과 집에서 함께 지내는 두 달여 동안 열정보스 덕분에 회사 일도 징글징글하게 넘쳐났다. 회사에서 힘들게 일하고 집에 돌아왔지만 온전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일상이었다.
작년 말, 번아웃이 찾아왔고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찾아보고자 처음 브런치를 시작했다. 글을 쓰는 재주는 없지만, 글을 적는 동안 마음이 정리가 되고, 나름의 재미도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내 마음을 글로 풀어내는 일이 조금은 버거웠다. 아무래도 내 못난 마음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평소 남편보다 내가 어머님과 통화를 더 자주 할 정도로 남편은 본인 부모님에게는 조금은 무심한 편이었다. 히틀러 급의 마이웨이 어머님 스타일에 일생 동안 어느 정도 피로감을 느낀 남편은 결혼 후 어머님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와 어머님과의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는 동안 어머님은 나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셨다.
양가 부모님을 챙기기가 버거워 각자 부모님한테라도 안부 전화를 드리 자고 하면, 본인은 원래 그 누구에게도 연락을 잘 못하는 스타일이니 이해해 달라는 사람이었다. 부모님의 음력 생신을 매년 챙겨서 알려주는 것도 나의 몫일 정도로, 남편은 부모님을 살뜰히 챙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좋은 남편과 아빠인 건 틀림없었지만 살가운 아들은 절대 아니었다. 내심 그런 아빠의 모습을 아이가 닮지 않기를 바란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남편이 요즘은 어머님을 마치 어린아이 마냥 소중하게 아끼고 보살핀다.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오롯이 느껴질 정도다. 위암에 관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뭘 묻기만 하면 의사 마냥 줄줄줄 대답이 나온다. 어머님께 하루에도 수차례 전화하는 남편의 모습이 처음에는 몹시 낯설었다.
어느 날부턴 내가 모르는 택배 박스가 집안에 가득 쌓이기 시작했다. 인터넷 쇼핑이라고는 한 번도 스스로 해 본 적 없던 남편이 어머님을 위해 온갖 암환자 전용 물품을 직접 주문했다. 지난 10년 동안 필요한 게 있을 때면, 내게 링크를 보내 구입을 부탁하던 남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일로 정신없는데, 남편이 대신 알아서 챙겨주니 고맙기도 했지만 그가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의아했다.
그 의아함이 약간의 빡침으로 바뀌었던 순간은 입덧 사탕이 도착했을 때이다. (맞춤법 검사에서 자꾸 “화남”으로 수정하라고 추천하지만, 이“빡침”보다 명확하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고상한 단어는 찾지 못했다.) 임신 내내 고약한 입덧탓에 모닝 구토로 하루를 시작하고, 외출할 때면 늘 검정봉지와 새콤달콤을 양쪽 주머니에 챙기고, 목적지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어김없이 도중에 내려, 노란 위액까지 쏟아내야 했던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입덧 사탕이었다.
‘헬로우~저기요? 아직 항암 시작도 안 하신 어머님이 혹시 메쓰거우실까 봐 미리 입덧 사탕을 주문하신 거지요? 아주 잘했어요. 근데, 몹쓸 입덧으로 퇴사까지 한 와이프에게는 왜 입덧 사탕을 챙겨주지 않았나요'
감사하게도 어머님은 큰 부작용 없이 항암을 잘 마치셨고, 구토 증상이 없으셨던 터라 입덧 사탕 두 봉지는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채, 집안 한편에 자리 잡게 되었다.
사실 백 번, 천 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친정 아빠의 암 진단 소식을 처음 들었던 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사무실에서 퇴근 직전 소식을 접하고 집으로 가는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았었다. 눈물이 뺨으로 채 흘러내리기도 전에 새 눈물이 금세 차올라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 괴로운 나날을 보냈었다.
남편의 마음과 행동을 누구보다도 이해하면서도, 그의 낯선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마음속 저 깊은 구석에서 서운함의 감정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우리 아빠가 처음 아프셨을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심지어 아빠는 병기가 더 나빴고 완치가 불가하여 지금도 암과 함께 살아가고 계시는데’
결혼을 통해 새롭게 맺어진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아무리 클지언정, 내 부모를 위하는 마음과 온전히 같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면서도 괜스레 비교가 되었다.
‘내가 아파도 저렇게 극진하게 간호하고 챙겨줄까?’
아픈 어머님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마음들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못난 마음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사람인가' 라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남편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자꾸 서운한 마음이 드는 내 모습이 참으로 괴로웠고, 한없이 쪼잔한 내 마음을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답답했다.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결국 나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감정을 안겨 준 남편이 다시 원망스럽다가, 결국은 이 모든 내적갈등의 원인은 부족한 나 때문이다 로 찜찜한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 같았다. 이러한 풀리지 않는 감정의 굴레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몇 주간 내 마음은 너덜너덜 해지다 못해 구멍이 숭숭 난 창호지 문처럼 닳아있었다. 우리 집 화장실 문이 내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색깔로 변해있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괴로운 내적 갈등이었다.
<화장실문의 변신은 시어머님과의 동거 2탄에서 확인하세요: https://brunch.co.kr/@8planets425/20 >
어머님은 첫 번째 항암을 큰 부작용 없이 무사히 잘 마치신 후, 시골에 가셔서 텃밭도 가꾸고 조금씩 움직이는 게 더 좋을 거 같다시며 우리 집에서의 동거를 종료하셨다. 얼마 전 오랜만에 연락한 친정 아빠는 요즘 김서방이 매일 엄마 아빠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고 하셨다. 바쁜 와중에 시어머님을 챙기느라 고생하는 와이프에게 너무 고맙다는 말도 덧붙인다고 한다. 어머님이 아프신 이후 남편은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게 확실하다. 이제라도 살가운 아들과 사위로 변해주어 고마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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