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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영 Feb 05. 2020

뜨거운 것만이 자국을 남기듯

데이기 싫어 만지지 않는 마음

  몇 달 전 중고 물품을 거래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에어프라이어라는 주방기구를 사들였다. 프라이팬에 굽거나 기름에 튀길 필요 없이 고온의 공기만으로 조리를 할 수 있다는 광고에 혹했다. 설명서도 아주 간단명료했다. 수동식 다이얼을 돌려 온도와 시간을 설정한 뒤 기다리세요. 경어로 읽게 좋게 쓰인 설명서지만 더 보지 않고 찬장에 넣어두었다. 에어프라이어의 사용법에 대해 통달한 것은 아니었다. 사용하기 위해 설명서의 내용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으며,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코드 꽂는 법이 서투른 아이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친절이 무색하게도, 모든 것을 알려주는 종이는 시시하다. 내가 다 알지 못한다 한들 말이다.


  왜인지 은밀하고 간결할수록 눈길이 간다. 인물의 미래를 닫아놓지 않는 엔딩이 더 여운이 짙고, 대개 그런 결말만이 끝없이 변주되는 악보 없는 연주마냥 관객의 망상에서 긴 수명을 얻는다. 여운을 위함은 아니지만 나 역시 모두에게 모든 걸 말하진 않는다. 감추려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를 설명하는 소개서, 장단점을 기술하는 간단한 이력을 적기조차 좀 까다로울 때가 있다. 일기장에조차 적고 싶지 않은 순간이 많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와 마음에 다름이 있다면, 감독의 원형 세계에서나마 모습이 굳건한 시나리오의 결말과는 달리 마음은 너무 감추다 보면 자신도 원형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검열과 생산이 같은 곳에서 이루어지다보면 자연히 생기는 현상이다.


  이상적 완벽을 좇다보니, 필연적으로 오래 끓고 많이 휘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나는 항상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극복에는 필연적으로 열이 따른다. 병원균을 저지하려 체온을 올리는 신체처럼, 한바탕 앓으며 불순물을 걷어내면 무엇이든 새로이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끓는점에 도달하지 못한 온도는 나를 앓게 하지 않고 데이는 고통을 가할 수도 없으며, 차가운 온도로 돌아가기도 애매하다. 뜨거워지고 싶어 있는 힘껏 발열하지만 섭씨 백도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은, 사실 ‘있는 힘껏’이라는 진술이 나를 이루는 것 중 가장 차가운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들을 남의 이야기처럼 외면하다보면 정말로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나에게 비밀이란, 대개 이런 것이다.


  나는 사실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온도의 사람이라는 것. 남에게 고백하긴 쉬우나 나에게 들려주긴 어려운 문장들이 많다. 에릭 메이젤은 「작가의 공간」 중, 나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싶은 것들은 많고 인간의 솔직하고자 하는 본성은 방어심리와 근심에 지고 만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일기를 거의 쓰지 않지만 가끔 그 게으름이 남겨놓은 어설픈 자취는 찾아볼 때가 있다. 삼 일, 보름, 한 달, 세 달… 성기게 짜여있는 시간을 듬성듬성 헤아리다보면 문득 일기가 확 싫어진다. 드러나는 게으름이 싫은 건 아니다. 지나치게 솔직한 활자들이 싫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려 애쓴 흔적이 싫다. 그 중 꼬박꼬박 붙여놓은 ‘다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이 제일 싫다. 진심을 덮는 방어기제가 너무 얄팍해서이다. 당연히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


 때때로 자아에서도 배제된 비밀을 발견하곤 한다.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도 비밀이지만, 인정하기 싫은 나의 모습도 반쪽짜리 내가 반대에게 부치는 비밀이다. 하나도 좋아지지 않을 걸 알면서 기계처럼 잘 될 거라고 덧붙이는 것,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나를 속이고 온순해지는 것. 어휘의 폭이 좁아지는 걸 체감하면서도 비속어의 사용을 교정하지 않는 것. 일기엔 인정하기 싫은 이런 말들이 쓰이거나, 그마저도 탈락되어 기억의 뒤안길에 뒹군다. 독자가 나밖에 없는데 나도 읽지 않는다. 이야기들이 등에 업힌 것 같다. 비밀은 없는 이야기이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등이 굽어버린 사람은 바닥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한가득 짊어지고도, 남의 은밀한 이야기라면 고개를 번쩍 든다.


  내 것은 찢어버리지만 남의 일기장은 들여다보려 기웃대는 것처럼, 솔직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매번 밖으로만 휘는 것 같다. 제 비밀은 꽁꽁 숨기고 남의 것은 캐내려 든다. 비밀의 힘은 알고자 하는 욕구와 솔직하고자 하는 본능이 섞여있는 듯하다. 그래서 가까워지고 싶을 때, 또는 가까워졌다고 생각할 때 일기장을 펴듯 조심히 나 사실 있잖아, 하고 운을 틔우는 걸까. 숨겨둔 탓에 색이 바래고 찾지 않아 서먹한 이야기는 언제나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등으로 유대하는 것만큼 짜릿한 관계도 없다. 검열을 통과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설명서엔 없을, 너무 뜨겁거나 차가운 그런 이야기들만이 오래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물만이 몸에 자국을 남길 수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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