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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혁 Oct 08. 2023

module 7: 대화를 가로막는 환상 2

우리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승-패의 환상

 바늘 두고 벌어진 싸움이 홍두깨를 부를 때가 있다. 사소한 오해로 시작된 싸움이 서로 자기주장만 하다 보면 대화는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어느새 큰 싸움으로 번져 있다는 뜻이다.


 이는 의견충돌이 벌어지면 어느 한쪽에게는 반드시 불리하게 결론 날 것이고, 내가 그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비롯된다. 이를 승-패의 환상이라 한다. 결코 양쪽 모두의 욕구가 충족될 수는 없을 거라는 일종의 강박이다. 과연 그럴까?




 지역 자치위원으로 활동할 때의 일이다. 회기가 끝나고 연말이 되어 새 임원진을 뽑게 되었다. 2년간 별 탈 없이 모임을 이끈 기존 임원진이 무난하게 연임할 거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분과장 하나가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표결이 진행되었고, 엎치락뒤치락 숨 막히는 대결이 벌어졌다. 기존 회장이 큰 격차로 수성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겨우 한 표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 뜻밖의 결과에 회장은 놀랐고, 한 달간 칩거에 들어갔다. 코로나가 한창인 까닭도 있었다.


 첫 정기회의 때 문제가 불거졌다. 느닷없이 임원진이 조직 개편안을 들고 와 통과를 요구한 것이다. 골자는 4개 분과를 5개로 늘리자는 것이다. 인원이 20여 명으로 많은 것도 아닌데 분과를 늘일 이유가 없었다. 그럴 경우 분과별 정원이 줄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위원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개편작업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갑작스러운 조직 개편에 위원들은 황당해했고 나 역시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개편의 이유를 물었으나 답도 시원찮았다. 자치회 발전을 위해 임원진이 고민한 결과이니 무조건 받아들여 달라는 말뿐이었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고 그럴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나는 개편안 무효와 함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편을 주도한 부회장도 물러서지 않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몇몇 위원들도 불만을 제기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9할은 침묵했다.


 동조하지 않는 위원들이 원망스러웠고, 외로운 싸움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분과장님 왜 이러시냐며 한번 보자는 부회장의 회유가 있었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카톡상으로 지루한 공방을 벌이다가 나는 결국 일신상 이유를 들어 사퇴해 버렸다. 이후 세명의 위원이 따라 나왔고 모임은 침체에 빠졌다. 이 일은 갈등을 공부하는 나에게는 흑역사로 남았다.


 그때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했을까. 좀 더 생산적으로 논의할 수는 없었을까. 한 번 보자는 부회장의 제안을 받아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후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지 않으려 애썼고, 상대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상대를 강하게 압박했다.




 개편안이 등장하고 통과시켜 달라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승-패의 환상에 빠졌다. "이건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교육문화분과장으로서 2년 간 헌신

한 것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위원들 참여가 배제된 개편안은 악이며 그게 통과되는 건 민주주의의 역행이고 굴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무조건 내 뜻은 선이고 상대는 악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닐 것이다. 흑과 백 사이에 수많은 색이 존재하듯 내가 주장한 '개편안 원천 무효'와 '개편안 통과' 사이에도 수많은 아이디어가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승-패 환상에 빠진 나와 부회장은 개편안 통과를 두고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공방을 이어갔다. 그 결과 조직은 긴 냉전에 돌입했고, 와해되어갔다.  




 의견이 충돌할 때 빠지기 쉬운 승-패의 환상은 결국 어느 한쪽에게만 유리하게 결론이 날 거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양쪽 모두의 욕구가 충족될 수는 없다고 믿는 것이다. 특히 우리에게는 한치라도 물러서는 걸 치욕으로 여기는 대쪽정신, 선비정신의 DNA가 흐른다. 협상에 취약한 이유다. 하지만 대화의 통로를 닫지 않고 소통한다면 제2, 제3의 방안이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물리적 파이가 한정되어 있다면 심리적 파이를 통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승-패 환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지'와 '반응'사이 공간을 둘 필요가 있다. 불쑥 올라온 감정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소통이 '강압하기'이나 '거리두기'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대화가 파괴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서로 지켜야 할 '그라운드 룰'을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엇보다 결코 변치 않는 게 고귀한 가치라고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때로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유연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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