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 모든 게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했다.
내려오면서 잠시 흐려졌던 날씨의 영향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하루 더 편하게 푹 쉬고 내일 오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내일은 비행기가 정상 운행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12박 13일 동안 함께해준 라즈에게 관례적으로 주는 소정의 팁을 줬다. 라즈도 오늘은 오랜만에 집에 가서 푹 쉬고 내가 떠나는 내일 아침 이곳에 다시 온다고 했다. 내일 나를 배웅해주러 온다는 라즈가 고마웠다. 내일 만나면 고마운 마음을 조금 더 표현해야지.
아쉬운 건지 어쩐지 잘 모르겠지만 평소와 달리 멋쩍은 듯 나를 바라보는 라즈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고 숙소로 들어왔다. 때마침 내가 숙소에 들어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이 구름으로 덮이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순식간에 외부 기온까지 떨어졌다. 이 타이밍은 무엇일까.
'정말 무서울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찬물이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씻고 머리까지 감았다. 정확히 10일 만에 얼굴과 머리에 물이 닿았던 그때 그 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그때의 내 기분을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인해 약간 춥기는 했으나 얼마나 개운하고 좋던지. 말 그대로 정말 좋았다. 행복이 별거인가. 내일 카트만두 숙소에 가서 샤워하고 빨래까지 하면 정말 최고로 행복할 것 같았다.
식당에서 차 한잔을 마시며 차분하게 생각해 봤다. 왜 오늘 못 떠났을까? 먼저는 트레킹 기간 내내 최고의 날씨를 이미 경험했었다. 그리고 오늘 내려오면서 했던 생각은 여유 있게 오늘 하루 더 이곳에 머물고 내일 떠나는 거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내려온 덕분에 하루라는 여유가 생긴 지금, 만약 비가 안 내렸다면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서 경비행기를 타고 카트만투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늘 저녁 차분하게 이 곳 히말라야에서 전체 트레킹 일정을 마무리하며 내 생각과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다. 누가 물어보더라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12박 13일 동안의 쿰부 히말라야(에베레스트 지역) 트레킹은 감히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어요. 나를 돌아보며 인생을 배울 수 있었고 덕분에 많이 성장할 수 있었어요. 시간이 흘러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인생에서 가장 값진 순간이었어요.'
앞으로 나의 인생이 더욱 기대되었다. 차 한잔과 함께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창 밖을 바라봤다. 잔뜩 낀 안개로 인해 활주로는 물론 산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비가 쏟아지고 그치기를 반복했다. 내가 산속에서 트레킹을 할 때 이랬다면 옷과 가방이 다 젖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상상을 해보니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이처럼 정말 답도 없었을 텐데 마치 내 모든 트레킹 일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시원한 비가 내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트레킹 일정은 모든 부분에서 정말 최고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루클라 로지의 음식 가격은 생각보다 비쌌다. 밥 한 공기에 4,500 원이라니.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비상식량이 남아있었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 남은 참치 캔 하나와 고추장을 섞어 밥 비벼먹기.
'그래! 이렇게 비싼 공깃밥을 먹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야.'
맛있게 밥을 먹고 2주 동안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봤다.
'와우! 예술이다.'
맑고 화창한 하늘과 만년설산을 배경으로 담아온 수많은 사진들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전혀 지겹지 않았다. 정말 환상적이었다.
'내가 참 좋은 시간을 보냈었구나! 정말 꿈같이 신기하네.'
사진을 보다 보니 다시 한번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제 비상식량도 전부 떨어졌고 물티슈와 화장지도 없었다. 모든 부분에서 정확하고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하늘을 향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편안하고 좋은 기분을 내 안에 가득 안고 쿰부 히말라야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