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고 감사합니다
* Lukla(2,845m)→Kathmandu(1,281m) 경비행기 타고 루클라에서 카트만두로 이동
내가 머문 로지 바로 옆에 활주로가 있었다. 05시쯤 경비행기 이착륙 소리를 듣고 눈이 떠졌다. 밖을 보니 날씨가 정말 좋았다. 오늘은 카트만두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아침 식사 후 07시쯤 밖으로 나가보니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헤이, 라즈!"
반가움을 담아 큰 소리로 라즈를 불렀다. 어제와 달리 말끔해진 차림의 라즈와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 시간을 확인하러 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늘 몇 시에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요?"
"아직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는데 이따 오전 10시쯤 다시 와봐요."
오늘은 비행기를 탈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안고 다시 숙소로 왔다. 간단히 세면 후 히말라야에서 마지막으로 배낭을 챙겼다. 숙식 비용을 정산하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그런데 주인은 아침에 내가 먹은 토스트와 오믈렛 가격이 빠진 영수증을 내밀었다. 뭐지?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고민 아닌 고민을 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솔직히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내 양심은 그러한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깟 6,000 원에 내 양심을 속이며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저기요, 근데 오늘 아침에 식사한 비용이 빠진 것 같은데요."
아침에 식사한 비용까지 추가해서 건네자 로지 주인은 놀란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단야밧!(네팔어로 고맙습니다)"
양심아 고마워.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뭔가 모르게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이런 적은 금액부터 양심을 지키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훗날 큰 금액 또는 큰 일 앞에서도 양심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침부터 뭔가 큰일을 해낸 것처럼 스스로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아침 일찍 확인했던 비행기의 예상 출발 시간이 3시간이나 지났다. 변경된 경비행기의 운항 여부를 기다리며 지치기 직전, 드디어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호, 대박! 드디어 간다.'
반가웠다. 정말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라즈에게 소정의 팁을 더 주며 다시 한번 고마웠다는 인사를 했다. 나의 포터(짐꾼)였던 라즈는 어리고 체구도 작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지나온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간에 답답한 부분이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라즈는 나에게 딱 맞는 포터였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 정말 고마웠어 라즈!'
낯선 히말라야에서 약 2주 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녀석. 트레킹을 출발하며 당황스럽게 포터(짐꾼)가 2명이나 바뀌었고 3번째 만나는 포터였던 라즈. 어쩌면 이 친구를 만났어야 했기 때문에 처음 2명의 포터는 그냥 스쳐갔던 게 아니었을까.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 채 진짜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정말 고마웠다.
라즈와의 작별인사를 하며 늘 쉽지 않은 헤어짐을 뒤로하고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감사하게도 조종사 바로 뒤인 맨 앞 좌석에 앉을 수 있었고 약 40여분을 날아 드디어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뭔가 모를 성취의 기쁨과 행복한 지금의 감정은 주체하기 어렵고 버거울 정도였다. 뜬금없지만 내리자마자 조종사에게 인증 사진도 한 장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사진을 함께 찍어줬다. 공항 도착과 동시에 벼르고 있던 카트만두에 있는 한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가자마자 한식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 메뉴판을 보며 나 혼자 2인분 메뉴인 제육김치볶음과 된장찌개를 시켰다.
'세상에, 세상에! 네팔에서 먹는 한식인데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니.'
얼마 만에 먹는 제대로 된 한식이었던지.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꿀맛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순식간에 밥 두 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처음에 나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코스 쪽으로 가볍게 2~3일 정도만 트레킹 할 생각이었지만 대학시절부터 알던 선배로부터 쿰부 히말라야 코스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도움을 받았고 덕분에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식사 후 그 선배와 만나 차 한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쿰부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를 추천해 줘서 고마워요, 미처 몰랐지만 겨울 침낭과, 패딩 그리고 스틱까지 가장 필요했던 장비들 하나하나 신경 쓰고 빌려주신 덕분에 잘 다녀올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와의 대화 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내가 경험한 무언가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나누고 베풀며 살아야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눈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나눈 작은 마음으로 인해 누군가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면 나누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돌아보면 나 혼자서는 결코 이곳에 올 수 없었을 텐데 선배의 트레킹 코스 추천을 시작으로 세 명의 포터와의 만남 그리고 트레킹 하며 만났던 한국인 아저씨를 비롯한 수많은 트래커들이 떠올랐다. 또한 셀 수 없이 많던 밤하늘의 별들과 은하수, 만년설산을 배경으로 화창하게 맑기도 했고, 강한 바람과 먹구름으로 인해 흐리기도 했던 날씨. 조급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여러 경험들, 거기에 지나온 날들과 마주하며 현재를 재정비하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던 마음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었다.
또한 짧은 트레킹을 통해 깊이 있는 인생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깨달은 인생 공식들은 방향, 지속, 여유 이 세 가지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아등바등하기보다 먼저는 내 옆에 있는 진짜 소중한 사람들에게 잘해야 하는 것. 그리고 더 멀리, 오래가기 위해서는 조급함보다 더 중요한 휴식의 필요성을 기억하며 힘들고 지쳐 포기하고 싶더라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한발 더 내딛기. 또한 힘들 때마다 스스로 '할 수 있다'라고 3번 외쳐 보기. 무엇보다 모두가 가는 길이라고 해서 나 또한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따라가기보다는 남들과 조금 달라도 내가 가고 싶고 가야 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갈 수 있는 용기를 불러내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속하겠다는 마음과 열정적 끈기, 오르막 내리막의 조화를 모두 즐길 줄 아는 여유와 겸손함까지 모든 순간들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때의 순간들이 눈 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듯이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히말라야에 있었던 나 자신과 수시로 마주하며 살아가고 싶다. 단순히 지나온 과거를 추억하는 것도 좋겠지만 내가 직접 느끼며 깨달은 것들이 내 인생에 좋은 동기부여가 되리라 믿는다.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로, 때론 공감과 위로자로 나의 작지만 소중한 경험들이 내 삶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삶에 잔잔하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도 동일한 것들이 전해졌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의 히말라야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있는 그대로의 가감 없이 솔직하고 담백했던 히말라야 이야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