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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Jan 27. 2022

제주목사 근무지 : 제주목관아

서울엔 경복궁, 제주엔 제주목관아

관덕정 관람을 마치고 제주목관아로 향한다. 7년 전에 왔을 때 굉장히 휑하다 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관람 때는 어떨지 기대된다. 




제주목관아의 복원



제주 목관아는 세종 16년(1434) 화재로 건물이 홀랑 다 타버렸고, 이후 공사를 시작으로 하여 조선시대 내내 중, 개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대대적으로 훼손되어 관덕정 빼고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1993년 3월 제주목 관아 일대가 국가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조사를 하며 유물 등을 출토한다. 이후 다양한 문헌들의 글과 그림을 바탕으로 복원 사업을 벌인다. 현재 복원은 2002년 12월까지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관덕정을 제외한 모든 곳에 제주경찰서와 민가들이 들어앉으며 제주목 관아‘지’라고 불리던 곳이 옛 관아 건물 복원공사를 이루면서 제주목관아로 이름도 바뀌었다. 복원에 필요했던 기와 5만여 장은 모두 제주시민의 헌와로 모아졌다고 하니 제주인들의 복원 의지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1702년의 <탐라순력도>와 1706년 경의 <탐라방영총람>을 복원의 기초 자료로 삼아 조선 후기의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세밀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과 남쪽 구역은 전혀 복원되지 않았고, 북쪽 구역도 일부만 복원된 상태이다. 



제주목관아 ‘상아’의 외대문 : 진해루


제주목관아를 살펴보려면 여러 용어를 이해해야 한다. 제주목사가 집무하던 북쪽 구역을 ‘상아’라고 한다. 매표를 하고 들어가는 ‘상아’의 외대문이 바로 2층 누각건물 ‘진해루(鎭海樓)’이다. 바다를 진압하는 누각이라는 뜻이니 가히 '제주'에 걸맞은 이름이다. 



본래 누각 위에 시각을 알리는 종이 있었다. 이의식 목사가 종을 녹여 무기로 만들었으나 장인식 목사가 전라도 미황사의 종을 사들여 달았다. 하지만 숟가락, 요강까지 긁어가던 일제 강점기를 버틸 순 없었다. 지금은 북처럼 보이는 물체가 보였는데, 비닐로 싸여 있어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연꽃 보며 술 마시고 놀자 : 우연당


외대문으로 들어서서 왼쪽을 보면 ‘우연당(友蓮堂, 벗 우, 연꽃 연, 집 당)’이 있다. 연꽃과 벗을 한다는 뜻의 건물은 연회를 즐기는 곳이었다. 




이번엔 귤 먹으며 놀자 : 귤림당


귤림당(橘林堂, 귤 귤, 수풀 림, 집 당)도 역시 노는 곳이다.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타거나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이다. 이원조 목사의 <귤림당 중수기>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으로 된 국과원이 모두 36곳인데, 홀로 이 귤림당만이 연희각 가까이에 있다. 입추 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려서 많은 알갱이가 누렇게 익는다. 공무를 보는 여가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들을 쳐다보노라면 심신이 다 상쾌해진다. 그러나 귤림당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영조 19년(1743) 안경운 목사가 개건하였고, 영조 45년(1769) 중수한다. 헌종 8년(1842)에 이원조 목사가 다시 중수하였다. 




제주목관아 내부에 있는 귤 과수원 : 제주목 과원


앞서 말한 제주목관아 복원 때 기초 도면이 된 <탐라방영총람>에 따르면 제주 성안에 동, 서, 남, 북, 중과원 5개와 별과원 등 6개의 과원이 그려져 있다.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형상 목사가 쓴 <남환박물(1714)>에도 ‘동헌 옆 귤림당에 북과원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제주목관아 내에 제주목 과원을 복원하였다. 6~7년 전에 제주목관아에 왔을 때는 못 봤던 것 같다. 여러 종류의 귤들이 나무와 함께 이름표가 같이 있어 귤 종류를 비교할 수 있어 좋다. 물론 제주목관아에 푸르름을 더해주는 역할도 해준다. 



가을, 겨울에 와서 노랗게 익은 귤을 보고 싶어 진다. 



제주 군사 총지휘관이 일하는 곳 : 홍화각


우연당 뒤에는 ‘홍화각(弘化閣, 클 홍, 될 화, 집 각)’이 있다. 홍화각은 ‘왕의 어진 덕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가진다. 세종 17년(1435) 화포를 발명한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 목사가 지은 건물이다. 홍화각의 별명은 ‘영청’이다. 안무사, 방어사, 절제사가 근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따로 있는 직책이지만 제주라는 위치의 특성상 제주목사가 겸직하였다. 




군인들이 근무하던 곳 : 영주협당


영주협당(瀛洲協堂)이 있다.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이다. 1832년 한응호 목사에 의해 중건되면서 공제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주목관아의 동헌 : 연희각



홍화각 뒤에 위치한 연희각(延曦閣 늘일 연, 햇빛 희, 집 각)은 제주 목사가 집무하던 공간이다. 상아의 동헌, 목사의 정아라고도 불렸다. 첫째인 관아라는 뜻의 ‘상아’와 구분되는 용어는 ‘이아’이다. 이아는 관덕정 남쪽 구역의 건물로 둘째인 관아, 버금가는 관아라는 뜻이다. 이아는 행정 관리들이 근무하던 공간이다. 


이원조 목사의 <연희각기>에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이 없어서 건치 연원일을 상세히 알 수 없다. 현판도 누가 명명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라고 한 것은 신하가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1924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린 것을 복원한 것이다. 



오매불망 서울 가기만을 바라던 : 망경루


외대문의 정면엔 중대문이 있다. 외대문과 중대문을 이은 직선의 끝에 망경루가 위치하고 있다. 원래 그 사이에 내대문도 있어야 하나 현재는 ‘내대문지’라고만 되어 있다. 


서울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의 망경루(望京)는 관아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이다. 지방도지사를 하랬더니 국회의사당만 쳐다보고 있는 셈이다. 목민을 하기 위해 아래의 백성들을 가까이서 살펴야 할 수령이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중앙 정계로의 복귀만을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던 공간이다. 



명종 11년(1556) 김수문 목사가 창건한 뒤 현종 9년(1668) 이인 목사가 개건하였고 순조 6년(1806) 박종주 목사가 중수하였다. 철종 12년(1861) 신종익 목사가 누대에 좌탑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주에 유배 온 광해군은 망경루 서쪽에서 돌아가신다. 



원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제주목관아


외에 건물이 올라가지 않고 주춧돌만 남아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청심당지, 회랑지, 노비행랑지, 동헌내아지, 영리장방지, 호적고지, 애매헌지, 예리장방지, 예고지, 교방지, 마구지, 심약방지, 내대문지 등이다. 


복원에 얽힌 수많은 이해관계와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건물들을 복원하여 빽빽하게 채워넣는 게 가장 좋은 복원은 아닐 것이다. 여러 번 중수를 거친 제주목관아인 만큼 '원래 모습'이라는 건 없고, 또 아무도 모른다. 제주목관아 자체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보다 주위를 어우러지게 하는 게 훨씬 좋을 것이다. 경복궁을 비롯하여 옛 건물을 방문할 때마다 아쉬운 점은 주변과 어우러지지 않은 외딴 섬 같은 느낌이다. 황량하고 또 씁쓸하다. 제주목관아도 마찬가지이다. 망경루에서 푸르른 제주 바다가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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