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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Oct 28. 2021

제주의 상징, 제주의 광장 : 관덕정

관덕정의 역사, 벽화 그리고 돌하르방

관덕정을 지나는 올레 17코스를 마무리하는 날. 올레 길을 걷고 지친 상태로 제주의 상징을 감상하고 싶지는 않아 올레길을 시작하기 전에 관덕정과 제주목관아를 방문한다. 


관덕정의 역사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자 조선시대 이래로 제주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일제 강점기 때 처마 끝이 변경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래도 견디어 살아내줌이 대견하다. 국가지정 보물 322호이지만, 사람들이 신발 벗고 쉽게 들어갈 수 있고 누워서 쉴 수도 있으며 비나 해도 피할 수 있는 관덕정은 열린 공간이다. 


'관덕(觀德 볼 관, 클 덕)'이란 ‘훌륭한 덕행을 드러내어 보임’ 또는 활쏘기를 보면 덕행을 살피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제주 관덕정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에서 유래한 말이다. <탐라지>에 따르면 조선 세종 30년(1448) 안무사 신숙청이 상무 정신을 함양하고 왜구를 무찌르기 위한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세워졌다. 성종 11년(1480) 중수되었고 1969년까지 여러 차례 중수와 개축을 거쳤다. 1924년 일제가 15척 이상 나온 처마를 2척 이상 잘라버려 원 모습이 크게 훼손되었다. 현재 건물은 철종 원년(1850)에 재건한 것을 1969년과 2006년에 보수한 것으로 건축 기법은 17세기 양식이다. 


관덕정의 판액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글씨였으나 전해지지 않고 현재의 글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작품이라고 한다. 관덕정 안에는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도 있고, 그 아래 '탐라형승' 편액도 걸려있다. 이 작품 역시 아계 이산해 또는 정조 때 제주목사를 지낸 김영수의 글씨라고 한다.



관덕정의 규모는 앞에서 보면 5칸, 옆에서 보면 4칸이고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시원하게 사방으로 탁 트여있다. 




관덕정 대들보 아래 벽화


관덕정은 밖에서 봤을 때의 규모와 지붕의 유려함 뿐만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보면 벽화들이 세심하게 그려져 있다. 벽화는 총 7점으로, 제주에서 발견되는 벽화로는 유일하다. 하지만 그린 이는 전해지지 않는다. 


두보가 귤을 던지는 여인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태연자약했다는 고사를 담은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난을 피해 바둑을 즐기는 선비를 그린 '상산사호(商山四皓)', 10만 적군을 앞에 두고서 태연하게 거문고를 타며 적군을 물리치는 제갈공명 '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 손권과 유비가 조조를 격파하는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고려 무인들이 사냥하는 '대수렵도(大狩獵圖)', 유방에게 연회를 베푼 후 역습하려다 후환만 얻은 항우 '홍문연(鴻門宴)' 그리고 '십장생도(十長生圖)'이다. 


취과양주귤만헌, 상산사호


주제들이 각양각색이나 그래도 주를 이루는 것은 '무'이니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지어진 목적에 맞음직하다. 

십장생도


이렇게 높이 위치한 작품들은 멀기도 멀고, 특히나 오래된 것들은 흐릿하여 제대로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미술관도 눈높이가 아니라 높은 곳에 걸어놓은 작품들은 열심히 보지 않게 된다. 


대수렵도



제주의 찐 돌하르방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돌하르방은 외할아버지 댁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 걸이에 위치했던 작은 돌하르방이다. 예쁘다는 느낌을 받기엔 칙칙한 검은색에 구멍까지 숭숭 뚫려 있어 거친 표면을 가지고 있던 이상한 모양이었다. '돌하르방'이라고 쓰여있지 않았다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 댁에 갈 때마다 항상 봐야만 했던 돌하르방. 


이렇게 돌하르방은 복제되고 복제되어 수도 없이 많지만 '찐'돌하르방은 제주에 47개뿐이다. '진짜' 돌하르방을 찾아다니는 여행도 재미가 있다. 제주시에 21개, 정의에 12개, 대정에 12개, 서울 국립 민속박물관에 2개가 있다. 제주시에 있는 21개 중에 관덕정에서 볼 수 있는 4개의 돌하르방은 '찐'이다. 


이들 돌하르방은 제주읍성 성문 밖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영조 30년(1954)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관덕정의 앞을 지키고 있는 2기의 돌하르방은 얼굴을 보면 우락부락한 느낌이다. 절에 가면 사천왕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 같다. 부라리고 있는 눈과 감귤 같은 코, 그리고 꽉 다문 입이 근엄해 보인다. 두 기의 오른손과 왼손을 배에 올려놓는 위치가 달라 돌하르방을 만드는 데에는 정해진 양식이나 기준이 없었음이 느껴진다. 손의 크기도 위치도 자유롭고, 돌하르방 자체의 크기도 다양하다. 커다란 주먹 안에는 언제든 던질 수 있는 돌을 쥐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관덕정 뒤뜰에 있는 두 기의 돌하르방은 관덕정 앞에 있는 무서운 표정의 돌하르방과는 다른 느낌이다. 살짝 미소 짓고 있으며, 눈과 코도 덜 튀어나와있어 한결 부드러운 인상이다. 경계심을 많이 누그러뜨린 듯하다. 또, 크기도 앞의 216cm, 213cm에 비해 작아 171cm, 146cm로 나지막하다. 



광장은 시민의 공간이다


관덕정은 제주의 중심 제주목관아 앞에 있으면서 제주 목관아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정치, 역사,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자 제주인들의 광장이었다. 1813년 제주가 독립국임을 선언하며 일어난 양제해의 변과 1901년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정부의 과도한 조세 수탈 등의 원인으로 일어난 이재수의 난이라고 불리는 신축년 농민항쟁, 그리고 4.3 사건의 시발점이 된 1947년 3.1절 기념행사가 열리던 곳, 그리고 1949년 6월 4.3 항쟁 무장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며칠 동안 내걸려 있던 곳도 바로 이곳 관덕정 앞 광장이다. 


제주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현장 속에 빠지지 않는 관덕정이나 지금은 남대문처럼 지나가는 자동차들 옆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인다. 어떤 정신 나간 차가 지나가다 박으면 훅 하고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은 문화재에 굳이 더해지지 않아도 될 '스릴'을 보태어준다. 더 이상 '광장'이라고 부르기엔 터무니없이 좁은 공간. 그냥 제주목관아를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만 밟을 법한 면적이다. 



제주인들이 모여서 '광장'에 맞게 무언가를 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앞으로 제주인들은 어디에 모여 목소리를 모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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