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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Oct 27. 2021

산방산을 굽어보며 박수기정, 월라봉 : 올레 9코스

고요하고 아름다운 평화의 길 올레

# 6 km

# 대평포구 ~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

# 상징 : 박수기정

#  21년 7월 16일 11시 55분 ~ 14시 30분 (2시간 35분)



나의 올레길 바이블인 「 제주올레 가이드북 」에 따르면 소요시간은 3~4시간이며 난이도는 상에 속한다. 


https://www.jejuolle.org/trail/kor/olle_trail/default.asp?search_idx=12



ENTJ 에겐 힘든 계획 밖의 즉흥 여행


10코스는 힘을 너무 줬던 반면 9코스는 아예 즉흥적으로 시작한다. 오전에 고근산을 올랐다가 이후엔 종달에서 카이트서핑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바람이 적어 카이트 서핑이 힘들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럼 뭘 할까? 하다 9코스를 걷기로 결정한다. 나의 올레길 바이블인 「제주올레 가이드북」에서 말씀을 읽지 못했음에도 일단 출발해본다. ENTJ에게 준비와 계획이 되지 않은 걸음은 뭔가 불안하다. 


이 날은 날씨가 엄청난 날이다. 동쪽 바다 소식통은 바람이 적다 하더니 바람 자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오전에 소나기가 쏟아졌고, 멎었다. 하지만 하늘은 금방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잔뜩 찌푸린 회색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산 할아버지 헛기침하듯이 계속 꾸르릉 꾸르릉 하며 낮은 소리의 천둥소리가 배경에 깔렸다. 올레길을 걸으면서도 비가 살짜쿵 내렸다 안 내렸다를 반복했다. 


올레 8코스 마무리를 7월 19일에 했기 때문에 박수기정을 본 것은 9코스를 걸을 때가 처음이다. 박수기정을 정면에서 보는 것은 바다 쪽에서 봐야 한다. 옆모습을 흘끗 비껴봐야 해서 절벽의 모습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다. 





9코스 시작부터 가파른 : 몰질


박수기정 근처에서 물놀이를 하는 두 세명의 사람을 지나 바다를 뒤로하고 산 길로 들어선다. 시작부터 분위기가 장난 아니다. 너무 좋잖아! '몰질'은 몽고 직접 지배기 100년 동안 말을 조공으로 바치기 위해 방목하던 말이 대평포구로 내려오는 ‘말길’이다. 말들은 이 길을 따라 내려와 원나라로 실려갔을 것이다. 



이 길이 느낌이 9코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꽤나 좁은 길이면서, 꽤나 경사가 있다. 제주답게 대부분 돌길이어서 서부 중산간 마을에 살던 말들이 내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말길이라고 하니 굉장히 높을 것 같은 느낌인데 그렇지도 않다. 박수기정을 구경하러 왔다 이 몰질만 올라갔다 내려가도 좋을 것이다. 




마라도, 가파도, 형제섬이 보이는 한밧소낭길


나무로 둘러싸여 어두운 몰질이 언제 끝났는가 싶게 평지의 오솔길이 나온다. 이 길의 이름은 한밭소낭길이다. 바다 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위는 넓고 평평하여 농지가 많아 '한밧'이라고 한다. '소낭'은 소나무란 뜻. 길이름 그대로 양 옆에 밭과 소나무를 끼고 걷는다. 오솔길은 차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너비의 시멘트 길로 바뀌지만 올레길의 풍취를 해칠 정도의 느낌은 아니라 좋다. 저 멀리 마라도와 가파도 그리고 형제섬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며 바다 풍경에 다양성을 더해준다. 


원래는 박수기정 위를 지나는 볼레낭길이 9코스의 일부였으나 빠져있다. 


산방산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한 발자국씩 가까워진다. 1,2 코스 때도 동쪽의 랜드마크 성산일출봉에 시선을 고정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장관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9,10 코스도 마찬가지다. 서쪽의 랜드마크 산방산이 나뭇잎 사이로 나타났다 가려졌다 하는 모습이 9코스를 다채롭게 만든다. 




산방산을 바라보며 : 월라봉 


귀여운 오솔길은 월라봉으로 이어진다. 월라봉 오르는 길은 대부분 흙길이다. 월라봉은 표고 200.7m의 오름이다. 다래오름, 도래오름이라고도 불린다. 도래(다래) 나무가 많아서 그렇다는 설과 돌(달)이 떠오르는 오름이라는 설이 있다. 월라봉은 '망동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경사가 있어 하체 근육 운동이 되는 월라봉의 오르막이 좋다. 등산로는 흙과 돌로 이루어져 있지만 간혹 나무 데크로 된 계단도 있다. 


우르르릉 구르르릉 대는 하늘


오르막길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평지 길도 있다. 그리고 월라봉은 소를 방목하는 곳이다. 올레 9코스는 많은 소떼가 길을 막아 올레안내소에 전화가 많이 온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비가 오고, 천둥이 구릉대는 날이라서 그런지 소떼를 마주치진 않았다. 참고로 소떼를 만나면 주위에 나무 막대기를 주워 소몰이꾼처럼 '워어이 워어이'라고 해야지 비킨다고 알려주셨다. 그냥 '저리 가! 비켜!'라고 하면 절대 못 알아듣는다고. 


그리고 월라봉에도 역시나 일본 동굴 진지가 있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꼭 보는 일제강점기 흔적이다. 월라봉에서만 총 7개가 있다. 주 진지가 폭 4m, 높이 4m에 깊이가 80m라고 하니 이를 파기 위해 고생하셨을 제주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시다. 



진지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너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다음을 기약한다.




월라봉 내려오는 길


3km 지점의 월라봉 정상 전망대를 지나면 종점까지 딱 반 남았다. 이후에 남은 3km는 주욱 내리막길이다. 나무 데크가 깔려 있어 쉽게 내려올 수 있다. 



나지막한 천둥이 계속 구르릉 대는 와중에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살짝 보인다. 그 아래로 제주의 서쪽 오름 군락들을 볼 수 있어 왼쪽으론 산방산, 뒤로는 마라도와 가파도, 앞으로는 오름이니 사방을 둘러봐도 황홀한 풍경이다. 즉흥적이지만 역시나 실망할 일 없는 올레길이다. 



월라봉을 거의 내려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나와있다. 



안덕계곡을 지나 창고천 물을 만나고


귀여운 귤밭을 지나면 안덕계곡이 나온다. 안덕계곡을 직접 들어가려면 다른 길로 가야 한다. 1132 도로를 다니다 보면 '안덕계곡' 이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올레 9코스에선 안덕계곡을 위에서 지나간다. 그래서 시원한 물소리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걷는다. 안덕계곡을 둘러싼 난대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안덕계곡의 다른 이름은 '올랭이소'이다. 야생 오리가 많이 날아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계곡에 오리가 많이 온다니 신기하다. 안덕 계곡 자체를 가보지 못해서 다음에 가봐야겠다고 다짐한다. 


뒤돌아보니 방금 전에 내려온 월라봉 숲을 이룬 나무들이 포근하고 아름답다. 


안덕 계곡을 지나온 물은 바다를 향해 가며 창고천을 만든다. 창고천에 닿았을 땐 해가 쨍쨍 내리쬐는 하늘이 되어 있었다. 창고천을 건너는 다리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는다. 13시 40분. 1시간 45분밖에 걷지 않았다. 



9코스의 종점 :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 


마무리를 코앞에 두고 식당에 들어간다. 올레길을 걷고 나서 먹으면 무엇이든 맛있으나 특히 이 가게는 더 맛있다. 카카오맵 평점 5.0을 가지고 있는 엄청난 식당. 튀김 돔베 정식을 먹었으나 2인 이상시킬 수 있는 다른 메뉴도 먹어보고 싶어 진다. 



2시간 이면 끝냈을 9코스가 식사 시간으로 30분 늦어져 2시간 30분에 마무리된다. 말들이 오갔다는 몰질도 좋고, 경사가 어느 정도 있는 것도 좋으며, 짧은 것도 좋다. 준비 없이 방문하여 조금 두려웠으나 아름다움과 큰 행복을 주어서 더욱 소중했던 9코스이다. 운동도 되면서 걸음걸음마다 바뀌는 산방산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숲 속에 파묻히는 월라봉도 좋다.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에 위치한 제주올레 공식 안내소의 올레지기 말에 따르면 올레 9코스는 두세 시간으로 짧기 때문에 올레꾼들이 10-1코스 가파도 코스와 함께 하루에 묶어서 걷는다고 한다. 가파도 올레가 평지로 짧고 간단하니 그렇게 걸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소나기 그리고 무지개


9코스를 마무리하고 차에 돌아가자마자 소나기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이 비를 맞았으면 쫄딱 젖었겠다 싶은 엄청난 소나기의 양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섬 날씨. 정말 어렵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더 노는 것을 포기하고 중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백미러로 보이는 풍경은 파란 하늘인 것 아닌가. 


'지금 내가 있는 이곳만 비가 엄청 내리는구나. 좀 더 서쪽으로 가면 비가 안 오는 가보다.'


즉각 유턴하여 파란 하늘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그곳엔 무지개가 있었다. 독특한 모양의 바굼지 오름과 산방산 사이에 부끄럽다는 듯 연한 빛의 무지개가 하루 종일 구릉 구릉 대면서 비를 쏟아냄을 보상해주듯 걸려있다. 오늘도 행복한 제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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