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를 걷어찰까?
아이가 학원에 안 갔다. 휴무일이라 아침부터 부지런히 러닝을 하고, 모처럼 사람들과 한정식 한상 점심을 먹고 집에 들어갔는데 초 3 아이가 가야 할 영어 도서관에 안 가고 뒹굴고 있다. 개별 수업이니 지금이라도 가라고 했지만 아이는 졸리다며 늘어지더니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1차 인내. 깨고 나서도 아이는 만화책만 뒤적이며 가지를 않는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엉덩이라도 걷어차 내보내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지만, 그 마음을 알아치리고 결국 참았다. 나 자신 칭찬해.
아이가 학원에 가지 않거나 숙제를 하지 않을 때, 학교 음악 발표회 악기 연주 준비를 하지 않을 때 엄마인 내가 천불이 나는 이유는 뭘까? 아이는 아이의 인생을 사는 것, 내 인생 아닌 것을 알아도 그 집착을 끊기가 쉽지 않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인이 새기게 들어야겠다. 한두 번의 불성실함이 습관이 되어 불성실한 어른으로 자라날까 하는 불안이 분노가 된다. 한두 번 학원을 빠진 아이가 학교도 빠지고, 커서는 회사도 빠지고 사람 구실 못하고 살까 봐?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른 중에 기분 내키면 회사에 가고, 안 내키면 안 가는 사람은 흔치는 않다. 세월이 지나고 어른이 되면 해결되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 엄마 몰래 학원을 땡땡이친 경험이 있다. 학교 준비물이나 숙제를 안 챙긴 적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많았던 듯하다. 성실함으로 승부를 보기보다는 효율적으로 결과를 내는 쪽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잘 살고 있다. 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두 아이 잘 키우고자 노력하고, 건강하게 살자고 러닝하고 마라톤도 나가고, 틈날 때마다 책 읽고 글 쓰고 이만하면 성실하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처럼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내면 소통> 어제와 완전히 같은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오늘 학원을 빠졌다고 내일도, 내일모레도 그렇지는 않다는 거다. 때로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믿음이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사춘기였을 때, 학원 가기 싫어 뒹굴거릴 때 우리 엄마가 나에게 어떻게 해 줬으면 좋았을까? 엉덩이 걷어차며 분노하는 엄마를 바랐을까? ‘오늘 피곤하구나, 다음번에는 잘해보자.’ 격려하는 엄마를 바랐을까?
오늘도 아이에게 졌다. 남은 분노를 잘 흘려보내는 것은 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