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청와대인 엘리제궁 방문기를 쓰고 난 다음 날, 소원했던 대로 청와대 관람 당첨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여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나름 치열했던 경쟁률을 뚫고 당첨된 그 기운을 받고자 5월의 어느 날 사람이 엄청나게 많던 청와대를 방문하게 되었다(실제로 경쟁률이 치열했던 모양인지 당첨이 안 된 줄 알고 한 번 더 신청했었는데 두 번째는 당첨되지 않았다). 대통령 취임 날짜에 급하게 개방을 맞춰서인지 당시에는 건물 내부는 관람할 수 없었는데, 건물 내부도 개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번 갔다 왔다. 이제는 예약제라 당첨제보다는 훨씬 여유롭게! 아, 그런데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해서 모든 건물의 내부를 다 둘러볼 수 없었다. 결국 다시 한번 더 가는 거로. 그때는 이렇게 더운 여름이 아닌 단풍이 아름다울 시원한 가을에...
프랑스의 청와대, 엘리제궁 답사기 ↴ ↴ ↴
'청와대, 국민 품으로'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새 정부에서 밝힌 청와대 개방 의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폐쇄적 공간이었던 청와대를 국민 모두가 누리는 열린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국민께 돌려드리겠다는 약속'. 정치에 조~금 관심이 있는 내가 그 행간을 해석하기로는, 개방의 숨겨진 뜻에는 전임자와 비교되는 탈권위적 행보를 부각함으로써 전임자에게 더더욱 제왕적 이미지를 덧씌우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이 의도가 맞다면 실제로도 잘 먹혔다고 볼 수 있는데, 청와대를 둘러보던 사람들은 한 마디씩 꼭 내뱉고는 했기 때문이다. '완전 구중궁궐이구만~'
나 역시도 유사한 감정을 겪었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대통령이 살던 곳이니 아무리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가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국은 신분제가 폐지된 국가인데 왜 나는 이곳에서 신분의 차이를 느끼는 거지?' 사실 건물의 화려함보다는(내부는 좀 화려하긴 했다) 면적이 주는 위압감과 국민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그들만의 세계라고 느껴서. 결국 그 비난의 화살은 전임자를 향해 갈 수밖에 없었는데, 청와대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부터 다 거쳐간 곳이긴 하지만 사람은 최근의 일만 잘 기억하니까. 그런 면에서 - 내가 읽어낸 행간이 맞다면 - 청와대 개방은 아주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문화유산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청와대 사진 감상 시간
청와대 본관. 청와(푸른 기와) 색에 맞춰 단청도 푸른 계열로 칠한 듯하다. 제일 아름다웠던 곳
침류각 침류각. 이곳에서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주변에 물이 있는 줄 알았는데(물이 있긴 있음) 알고 보니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였다. 그래서 건물 이름도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인 '침류'라는 이름으로 지은 게 아니었을까?
이미 백 년도 전에 폐지된 신분제를 체감하면서 청와대 건물을 둘러보는 중에 문득 프랑스혁명이 생각났다. 프랑스혁명 동안 왕족과 귀족의 재산이 국가의 것이 되면서 국민에게 돌아갔을 때, 왕족과 귀족의 소유물을 보던 민중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국민은 이렇게 힘든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았던 지도층에게 분노했을까, 아니면 귀한 유물들이 이제라도 국민의 것이 되어 기뻤을까? 당시 국민들의 감정은 개개인에 따라 달랐겠지만, 분명한 건 정부는 이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 정부는 1789년 11월 2일 법령에 따라 프랑스혁명 동안 몰수된 왕실과 교회, 귀족의 재산을 국가 재산(bien national)으로 소유했고, 추후 그 범위는 망명자의 재산까지 확장되었다. 국가에 귀속된 수많은 유물들 중에서 나는 루브르 박물관을 떠올렸다. 12세기 말 요새로 지어진 루브르 성(Palais du Louvre)은 왕궁으로 사용되었다가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으로 거쳐를 옮기면서 왕실 컬렉션을 전시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국회는 루브르 궁전을 국민에 개방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1793년 8월 10일 루브르 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대부분의 작품은 왕실과 교회에서 몰수한 재산이었다.
내가 특별히 루브르 박물관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국가의 재산으로서 유산을 보존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의식이 바로 이 프랑스혁명 때부터 생겨났고 그 일환으로 누구나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도록 개방된 루브르 박물관이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앙시앙 레짐으로 대표되는 왕정과 교회에 대한 분노의 화살이 바로 그들이 소유했고 거처했던 많은 기념물로 향했다. 그에 따라 수많은 유산이 파괴되거나 훼손되었고 또 팔려서 사라졌다. 사실 법령에 근거하여 약탈과 파괴가 계속되었는데, 1792년 8월 14일 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considérant que les principes sacrés de la Liberté et de l'Égalité ne permettent point de laisser plus longtemps sous les yeux du peuple français les monuments élevés à l'orgueil, aux préjugés et à la tyrannie » et « que le bronze de ces monuments, converti en canons, servira utilement à la défense de la Patrie »
'자유와 평등의 신성한 원칙은 더 이상 프랑스 인민의 눈 아래에서 거만함과 편견과 폭정을 위해 세워진 기념물이 존속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 기념물의 청동은 대포로 개조되어 조국을 수호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것임을 고려하여' 혁명 정부는 법령을 채택했다. 하지만 약탈과 파괴가 계속되자 파괴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고(이 시기에 그레구아르 신부 abbé Grégoire에 의해 '반달리즘(vandalisme)'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결국 1793년 10월 24일 국민의회는 봉건시대와 왕조의 흔적을 없앤다는 구실로 도서관, 컬렉션, 미술품 등을 파괴하고 훼손하고 변경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법령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의 광풍은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심어주었고, 그로부터 기념물 보호에 대한 공공 정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몰수된 재산은 국가의 재산이 되어 국가는 그것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교육의 중요성도 인식한 정부는 국민 통합과 군주제에 대한 승리의 상징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자 유산을 교육 및 교훈적 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왕가의 거처였던 루브르 궁이 모든 국민을 위한 '루브르 박물관'으로 변모한 것이다.
Huber Robert, Projet d'aménagement de la Grande Galerie du Louvre, 1796, Musée du Louvre Huber Robert, Une galerie du musée, 1798, Musée du Louvre 1784년~1792년, 1795년~1802년까지 루브르 박물관 수집품의 수집과 정리를 담당한 화가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가 그린 루브르 내부 그림. 루브르의 그랑드 갤러리를 복원하기 위해 화가가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그때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했던 프랑스 국민의 눈에 비친 루브르는 어땠을까?
나는 청와대를 걸으며 루브르 박물관을 떠올렸는데, 정부는 나랑 생각이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며칠 전에 청와대를 베르사유 궁전 같은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하겠다는 기사가 나왔다. 아마도 루브르 궁보다는 프랑스의 권력, 특히 절대왕권과 관계있는 베르사유 궁전과 대한민국 최고의 절대 권력인 청와대와 연관 짓는 게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글에서 베르사유 궁전의 역사까지 언급할 수는 없지만 베르사유 궁전 역시 프랑스혁명 당시 국가 재산이 되어 1793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현재는 궁전 투어와 공연이 열리는 공연장일 뿐만 아니라 제프 쿤스, 아니쉬 카푸어, 이우환 등 유명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역시 베르사유에서 전시를 해 논란을 빚은 적이..) 박물관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처음 청와대가 개방했을 때와는 다르게 베르사유 궁전 같은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한다는 기사의 코멘트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마리 앙투아네트로 상징되는 사치의 공간인 베르사유(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 저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팬..)가 가뜩이나 떨어진 지지율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부추긴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 물론 청와대는 국가에 '몰수' 당한 재산은 아니지만 -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줌으로써 청와대라는 공간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유산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후대에 물려줄 유산으로 함께 보존하고 관리해나가는 발걸음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혁명 당시 공교육위원회(Comité d'instruction publique de la Convention nationale)에서 채택된 <공화국 전역에서 예술, 과학 및 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보존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Instruction sur la manière d'inventorier et de conserver, dans toute l'étendue de la République, tous les objets qui peuvent servir aux arts, aux sciences et à l'enseignement)>이라는 긴 제목의 보고서에 적힌 교육에 대한 기본적 역할로 마지막 말을 보충하고 싶다.
Vous tous qui, par vos vertus républicaines, êtes les vrais appuis de la liberté naissante, approchez et jouissez ; mais couvrez ce domaine de toute votre surveillance. L'indifférence ici seroit un crime, parce que vous n'êtes que les dépositaires d'un bien dont la grande famille a droit de vous demander compte. [...] ; que chacun de vous se conduise comme s'il étoijt vraiment responsable de ces trésors que la nation lui confie.
공화주의자의 미덕을 지닌 여러분 모두는 새로 태어난 자유의 진정한 후원자이니,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그러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서 무관심은 죄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위대한 가문이 당신에게 책임을 맡긴 재산의 관리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각자는 국가가 여러분에게 위임한 이 보물에 대해 진정한 책임자처럼 행동하십시오.
P.S. 이번엔 내부 사진 투척! 내부 보호를 위해 덧신을 신발에 신고 들어가야 했는데 프랑스 박물관에 가면 항상 들을 수 있었던 나무 바닥 소리를 오랜만에 들을 수 있었다. 난 서양식 건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부에 아주 만족을 했는데, 뭐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혹 청와대 개방과 활용에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어떠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공화국의 가치와 혁명 정신을 홍보하고자 유산을 활용했던 혁명 정부로부터 프랑스의 유산 보존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것처럼 청와대 개방 이슈로 한국에서도 유산 보존에 대한 담론의 물꼬를 틀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야 아무렴 상관 없다는 뜻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에 청와대 활용을 담당하는 문화부에서는 이렇게 밝혔다. "청와대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전시 원칙과 마찬가지로 원형을 보존하면서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할 것"이라고. 하, 또 나를 설레게 하는(또는 괴롭히는) '원형 보존과 그에 따른 활용'이라니. 원형 보존에 대해선 전혀 생각도 못해봤는데 말이지... 앞으로 원형을 어떻게 보존하여 활용할 것인지... 기대해보자!
난 내부에 어울리도록 만든 이런 디테일이 너무 좋더라~
굳이 비교하는 이유는? 역시 내가 읽은 행간이 맞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