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외국어는 영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도 아닌... '일본어'였다. 97년도,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한일전을 보던 나는 한 일본 선수와 (일방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 선수는 바로... 현재는 일본을 대표하는 레전드이지만 당시에는 주목받는 신인이었던 '나카타 히데토시'. 지금도 그렇지만 한일전은 목숨을 건 실제 전투와도 같다. 일본에 1-0으로 지고 있던 한국이 2-1로 승리하며 대역전극을 거둔,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도쿄대첩이라고 회자되는 한일전이었다. 하지만 일본 선수에 꽂힌 나는 일본에 경기를 보러 갔던 아빠에게 "일본이 이겼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말을 했던 발칙한 초딩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외국 선수가 있는 타국 팀과 한국 국대가 맞붙으면 상대팀을 응원했던 나의 성향이... (9년 후 06 독일 월드컵 한국 vs 프랑스전에서도 계속)
일본의 레전드 '나카타 히데토시' 외국어를 꾸준히, 재미있게 배우고 싶다면 그 나라의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것은 아주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한 번 꽂히면 물불을 안 가리던 성향은 다행히(?) 일본어로 향했다. 27년 전, 초등학생이 외국어 학습 콘텐츠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유튜브나 앱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학원이나 교재, 또는 구몬이 초딩이 아는 세계의 전부였다. 그때는 엄청 어른처럼 보였던 중3인 친구 언니를 통해 일본어 교재를 빌려 일본어를 독학했다. 난생처음 보는 지렁이 같은(?)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외우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한자 덕분인지 고입 선발 고사 준비에 시달린 덕분인지 초보 수준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했지만 그때 외웠던 일본어 문자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일본어를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첫 번째 외국어인 일본어 학습 이후 외국어를 배울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문자와 발음 익히기이다. 나의 경우에는 뜻을 모르더라도 일단 외국어를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외국어 학습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반대로 외국어 학습을 위해 문자와 발음을 익혔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외국어라는 낯선 세계의 문을 열기 위한 나의 첫 번째 열쇠는 바로 문자와 발음 익히기였다. 20살이 되어서 처음 프랑스어를 독학할 때도 그랬다. 프랑스어 발음이 특히 매력적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프랑스어 단어 하나하나를 읽어나갈 때의 그 짜릿함이란. 요새 길거리를 돌아다녀 보면 프랑스어로 된 간판이 정말 많은데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천지차이이다. 거기서부터 외국어에 대한 흥미가 시작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주얼 쇼크를 일으킨 L'Arc~en~Ciel 하이도. 뮤비를 볼 수 있는 MTV는 유료 케이블 채널이었는데 지금은 유튜브로 볼 수가 있으니 세상이 참 좋아졌구나...
그 이후에도 나의 일본 (문화) 사랑은 계속되었다. 99년도에는 J-Pop에 푹 빠졌다. MTV에서 본 L'Arc~en~Ciel의 뮤직비디오 속 하이도와 또 (일방적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때 TV에서 보았던 강렬한 그 미모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라떼는 일본 대중문화 수입을 금지하던 시절이었다. 일본 출장을 가는 아빠와 숙모에게 부탁해 L'Arc~en~Ciel의 음반을 모으고 여기저기서 J-Pop 음악과 사진, 자료들을 모았다. 그때는 희한하게 일본어 공부에 열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일본 만화에서부터 일본 축구선수, 일본 음악 등 일본 대중문화를 좋아한 덕에(금지된 것을 더 갈망하게 되는 인간의 본성)당연하게 일본어를 전공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이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장래희망을 제출했을 때, '번역가'라고 적어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일본어 번역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프랑스어 번역가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지...
이제와 돌이켜보면 비평준화 지역에서 초, 중학교 때부터 입시 경쟁으로 치여 살던 어린이가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의지적으로 즐겁게 했던 공부가 외국어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좋아하게 되었고, 또 전공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전공과 직업으로까지 이어졌으니 말이다. 거기에 비록 초보 수준이긴 해도 일본어 문자와 기타 여러 서양 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으니 세상을 보는 여러 창은 외국어 사랑과 학습을 통해 덤으로 받은 선물이다.
P.S. 일본 축구 선수도, J-Pop도, 비주얼록에 대한 사랑도 지나갔지만, 일본 (추리) 소설에 대한 사랑만은 남아서... 책 번역하고 쉬는 시간에는 일본 소설을 읽는 일본 추리 소설 마니아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온 CD. 지금은 유튜브로 다 들을 수 있는 데다 어차피 CD 플레이어가 없어서 들을 수도 없지만 그때의 추억이 남아있어 차마 버릴 수가 없다...
'나나' 프랑스어판. 좋아하는 일본 만화를 보면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10여 년이 지나 이제 한국의 웹툰이 프랑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