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쇠퇴해도 사랑은 남아요
외할머니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후 2년에 한 번씩 한국에 나왔지만, 오랜만에 보는 막내딸이나 외손주들을 보고도 별달리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시킨 걸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조금이라도 굼뜨게 행동하면 대번에 알아듣기 힘든 함경북도 말씨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이야기할 때 자주 섞이는 '종간나'와 '썩을'이라는 표현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 쯤은 나도 알았다. 엄마는 꼭 할머니가 오시면 같이 목욕하라며 목욕탕에 날 밀어 넣었는데, 할머니가 유난히 아프게 때를 밀어서 요리조리 피하면 여지없이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게다가 외모조차 무척 이질적이었다. 150cm가 채 되지 않는 아담한 키, 이상할 정도로 작은 얼굴, 게다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움푹 들어간 눈. 당시 전국 모든 할머니들의 뽀글 머리가 아닌, 엷은 웨이브를 준 갈색 보브컷도 낯설었다.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꼿꼿이 편 허리만큼이나 고집도 무척 셌다. 빈말이라도 칭찬하는 법이 거의 없는 할머니는 내게 늘 어렵고 멀게 느껴졌다.
엄마가 회상하는 외할머니도 따뜻한 모성보다는 공포의 대상에 가까웠다. 사업이 망한 이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외할아버지에게 퍼부었다는 모진 말들, 추운 한겨울에 쓰레기 버리러 가기 싫다는 막내딸(울 엄마)을 돌계단에서 밀어서 구르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경악했다. 그전까지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빠듯한 살림에 세 자녀는 물론 북에서 내려온 친정 동생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기가 어디 쉬웠겠냐는 말을 하면서 이해한다고는 했지만, 엄마 역시 다정다감한 말 한마디 없이 매섭기만 했던 할머니가 아쉬운 눈치였다. 그래도 할머니가 80대 후반이 되어 더 이상 장거리 비행이 힘들어지기 전까지 2년에 한 번씩 서울을 찾을 때마다 엄마는 잘하려 애를 썼다. 오장동 함흥집에 자주 모시고 가서 좋아하시는 회냉면과 가자미 식해도 대접하고, 남대문 시장을 몇 바퀴씩 돌아 까다로운 할머니 취향에 맞는 잔잔한 꽃무늬 롱 원피스를 사 와 할머니 키에 맞춰 한참 잘라낸 아랫단을 밤새 박음질했다.
키 작은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흔둘까지 건강했던 할머니에게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이 찾아왔다. 몸 한쪽이 마비되었다. 아들 며느리가 모두 가게에 매여 있어, 요양원에 자리를 잡았다. 자식들이 매일 찾아갔지만 그곳에서 할머니는 조금씩 바래어갔다. 괄괄하던 성미도, 쨍하던 목소리도, 그리고 날카롭던 기억도. 천천히 치매가 찾아왔다.
언젠가부터 할머니는 자기 앞으로 온 편지가 없는지 묻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아들에게도, 딸에게도, 간호사에게도 물었다. 뒤죽박죽 되던 할머니의 시계가, 시간을 거슬러 중앙보육학교(현재 중앙대학교의 전신; 당시 유치원 교사를 양성하던 전문학교)에 다니던 스무 살에 멈췄다. 혼란스러워하는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이모는 할머니가 목 빠지게 기다리는 것이 첫사랑의 편지라는 걸 알았다.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약혼자. 몇 번 만나진 못했지만 잘생기고 키가 크다며, 아흔세 살의 자그마한 할머니는 복사꽃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러더니 몇 번 편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다며, 이내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여느 스무 살 아가씨처럼, 내가 싫어진 건지 혹은 아프거나 다쳐서 편지를 보낼 수 없는 사정이 생긴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했다. 전화 너머로 이야기를 들으며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할머니에게 이런 소녀같은 감성이 있다니.
새드엔딩이 예정된 영화 속 주인공의 행복한 한 때를 볼 때처럼, 이후의 스토리를 알기에 마음이 미어졌다. 할머니는 곧 폐병에 걸리고 서울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인 함경도로 돌아갈 터였다. 폐병은 죽을병이라고 여겨지던 시절, 약혼은 자동으로 없던 일이 된다. 다만 그전에 할머니의 편지에 답장이 오지 않은 것은, 약혼자의 룸메이트가 무슨 이유에선지 편지를 숨겼기 때문이라 했다. 이후 기적적으로 회복한 할머니는 집안 소개로 외할아버지를 만난다. 일본의 비행학교에서 유학하다가 눈을 다쳐 한국으로 돌아오느라 혼기를 놓친 외할아버지와, 1930년대에는 노처녀였던 스물여섯 아가씨의 결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해도 해방과 전쟁 때문에 어지러웠던 세상.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에 자리를 잡고, 아이 셋과 북에서 내려온 친정 동생들을 거두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엄마와 열네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큰 이모가 시집가자마자, 가난이라는 놈이 머리를 들었다. 집안에 날 선 말들과 긴장만이 가득했던 이 시기를 회상하면, 엄마는 지금도 진절머리를 낸다. 할머니의 대거리에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던 유약했던 할아버지는 일찍 건강을 잃었다. 힘들게 뒷바라지했던 동생들과 사이도 점차 소원해졌다. 집안을 다시 일으킬 거라 믿었던 외아들은 결혼에 실패하고 한국을 떠났다. 몇 년 후 할머니도 미국으로 가서 결국 타향에서 눈을 감았다. 함경도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LA로. 길고도 고단한 여정이었다.
할머니가 복사꽃 같았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삶의 폭풍우. 그 길에서 할머니는 고단한 순간마다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몰래 꺼내 본 걸까. 언젠가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겠다는 소망이 삶의 이유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2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한국에 나왔던 이유도, 울 엄마의 추측대로 며느리와의 갈등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을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서였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가 두부장수가 되었다고 했고, 다른 이는 그가 극작가가 되었다고도 했지만, 어쨌든 할머니는 스무 살에 헤어진 약혼자를 다시 만나지도, 편지를 전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독기어린 싸움꾼이 아닌, 70년 세월 동안 잊혀져 버린 여린 아가씨를 설핏 엿보았다. 삶의 파도에 휩쓸려 사랑하는 사람도, 여류시인이 되고 싶었던 꿈도 잃어버린 할머니가 생의 끝자락까지 간직해 온 마음은 첫사랑이 아니라 가장 빛나던 시절의 자기 자신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편지에 대해 이모가 할머니에게 뭐라 둘러댔는지 나는 모른다.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할머니의 시간이 스무 살 즈음에 얼마나 오래 멈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모에게 '할머니는 천국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분을 만났을까?' 하니, 할머니를 꼭 닮은 이모가 '모르지.' 하며 웃었다. 그분을 만났든 만나지 않았든, 할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자기 자신과 조우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