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다고 남의 나라에 적응하는 게 쉬운 건 아니랍니다
초등학교 4학년 늦봄 어느 날, 아빠의 프레스토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데 엄마가 진지한 목소리로 우리가 외국에 나가 살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이유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10단지와 11단지 사이의 과속방지턱 때문에 차가 덜컹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지만, 내 심장도 같이 툭 떨어졌다. 아직 초등학교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은, 1990년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엄마가 나와 동생에게 이 소식을 알린 건 아빠의 발령이 거의 확정난 시점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외국행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미국도 아닌, 영국이라고 했다. 지금이야 해외여행도 많이 가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연예인들도 많아 미국이고 영국이고 친숙하지만 (심지어 유튜버 "영국 남자"도 있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지 고작 1년 - 영국에 살다 오기는커녕 발을 디뎌 본 사람조차 없었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소개 정도가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당연히 영어는 전혀 몰랐다. 중학교에 입학해야 "하와유? 아임 파인-앤 쥬?"를 배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동네 몇 안 되는 영어 학원에 보냈는데, 그마저도 알파벳 P자까지 배우다 비행기를 탔다. 영국에 도착한 후 이삿짐을 풀고, 동네 슈퍼에서 과자를 사고,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을 때까지도 나는 외국에 왔다는 자각이 없었다. 내가 다니게 될 학교에 마침내 첫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부모님과 교장선생님과 함께 교실을 둘러보고서야, 요샛말로 '현타'가 왔다. 교장 선생님의 말도, 같은 반 아이의 수줍은 인사도,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맥도널드에서 치즈버거에 피클 빼 달라고 주문해 주던 아빠가 여기에는 없다는 걸, 이제부터는 나 혼자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불과 석 달 전까지 4학년 10반 반장이었던 나는, 아주 간단한 지시사항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면, 교사와 다른 학생들도 퍽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대도시인 런던도 아니고,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 수지쯤 위치한 한적한 마을에서 영어를 전혀 못 하는 동양인 아이를 본 적이 거의 없었을 테니. 그 당시 그들 또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부족했냐면, 교장선생님이 앞으로 내 옆에 앉은 Charlene 이란 여자애더러, 내 영어 이름을 지어주라고 대뜸 부탁할 정도였다. 교장 선생님에게는 정말 한국을 무시한다거나, 영국 문화의 우수성을 뽐내겠다는 것과 같은 나쁜 의도는 전혀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영어 이름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생 여아들에게 인기폭발 이름이었다는 Joanne이 되었는데 (어쩌면 Charlene에게는 나쁜 의도가 있었던 걸 지도...), 우리 식으로는 ‘정숙이’ 정도 되는 이름이 아닐까 싶다. 어쨋든 요즘 이 이야기를 듣는 미국 친구들은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한다.
어쨌든 ESL도 없는 학교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 예민하게 귀를 쫑긋 세우고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려 애썼다. 영어 듣기 실력인지 눈치인지 모를 무언가가 빠르게 발달했다. 어느 날은 왁자지껄 하던 교실이 조용해지고 모두 빈 종이를 한 장씩 꺼내놓고 긴장 어린 표정으로 선생님 얼굴만 바라봤다. 그리고 선생님이 뭔가를 부르자, 아이들은 사부작사부작 적기 시작하길래 나도 일단 따라 했다. Two times two... two times four... two times seven... times가 곱하기라는 건 몰랐지만 대충 눈치로 구구단 쪽지시험이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말이 필요 없는 산수와 과학, 미술시간에는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래도 나는 혼자였다. 가끔 몇몇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의사소통을 시도하다가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순간, 어떤 여자아이가 내게 다가와 뭔가를 물었는데, 알아들을 수 없던 나는 "I am ten years old."라고 대답했다. 몇 달 후, 정작 그 친구가 물었던 건 내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지금 보면 별 일도 아니지만, 한국 나이로 이미 열한 살이었던 나는 이런 부끄러운 실수를 금방 잊거나 손짓 발짓을 동원해 '너와 놀고 싶다'라고 의사를 표시할 수 있을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다. 중간에 새로 부임한 젊은 여자 선생님이 몇몇 아이들에게 나를 도와줄 것을 당부했지만, 난 외로운 것보다 누가 날 불쌍하게 여겨 다가오는 게 훨씬 싫었다. 혹시나 나의 부족한 영어가 놀림감이 될까, 내가 약해 보이지는 않을까. 아이들에게 다가가지도 않고, 다가오는 아이들을 반기지도 않았다. 되려 충분히 혼자서도 즐거운 척, 원래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척, 혼자 놀 거리를 이고 지고 매일 학교에 갔다. 보물섬 만화책, 한국에서 가져온 공기놀이 세트와 예쁜 일기장. 지금 돌아보면 어린 게 성격 참 더러웠구나, 싶다. 고작 열한 살 밖에 안된 게, 영어 실수하는 게 뭐 대수라고. 좀 굽히고 들어가서 애들하고 놀지 그걸 못하고 혼자 겉돌아. 한 달도 아니고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갈 때까지 꼬박 일 년을. 안쓰러우면서도 바보 같다. (새 학교로 전학 간 후에는 과거를 청산하고, 다시 활달하고 친구 많은 아이가 되어 매우 즐거운 1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만 힘든 한 해를 보냈기 때문인지 그 이후로 성격이 삐뚤어진 것 같다.)
내가 모난 내 성격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는 아이들이 해외 생활에 적응하느라 겪는 마음고생에는 무심한 어른들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아이라는 이유로, 어른보다 훨씬 쉽게 적응할 거라 믿는다. 영어를 어른보다 빨리 배우고, 곧잘 능숙하게 하게 되는 건 맞지만, 그 대가는 아이에 따라 상당할 수 있는 마음고생이다. 삶의 터전이 바뀐다는 건, 누구에게나 큰 변화다. 여기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도 한국어를 주로 쓰는 가정에서 영어만 쓰는 정규 교육과정으로 편입될 때, 크던 작던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국에서 온 아이들은 당연히 더하다. 내가 함께 일하는 고객 중에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한 조기유학파가 많은데, 단 한 명도 어려움이 없었다는 이가 없다. 영어 못해서 받은 스트레스, 향수병, 인종차별 3종 세트는 기본이다.
초등학생을 외국으로 데리고 나올 계획이라면, 가장 먼저 내 아이를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1990년과는 다르게 해외 경험, 해외연수가 흔해진 2020년이라고 해도 매해 한국에서 도착하는 초등학생들을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알파벳을 배우다 말고 온 열한 살 짜리는 없지만, 낯선 나라, 낯선 언어에 적응한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는 아이의 성격이 정말 중요하게 작용한다. 누군가에게는 금방 적응에 성공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이 기간이 마음에 생채기로 남기도 해서 성격이 완전히 변해 버리기도 한다. 아버지 직장 때문에 따라왔지만, 결국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버리는 아이들도 있고, 가족들이 귀국한 후에도 아이가 미국 교육을 고집하여 기숙학교나 엄마가 기러기를 선택하는 경우들도 있다. 아이가 나처럼 실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인지, 실수를 좀 해도 둥글둥글 잘 어울릴 수 있는 성격인지도 중요하다. 만일 아이가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변화에 약하다면,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는 미뤄두길 권하고 싶다.
기간으로는 최소 2년 이상 있으면 좋다. 내가 1년을 허비(?)하긴 했지만, 1년만 더, 총 3년 있었더라면 영어 실력이 훨씬 더 발전했을 거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주변을 봐도 1년은 너무 짧다.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막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돌아가는 식이다. 아이의 나이의 경우, 나중에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영어 실력을 쌓기 위한 거라면 최소한 3학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만 4살에 와서 6살에 돌아간 내 동생은 영어를 꽤 빨리 배웠지만 빛의 속도로 잊어버렸다. 이미 모국어로 읽기와 쓰기가 완전히 자유로워야, 영어로 쓰기와 말하기도 빠르게 숙지할 수 있고 이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영어를 잊지 않고 계속하는 원동력이 된다. 너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오는 것도 좋지 않다.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은 좀 늦더라도 공차고 몸으로 뛰어놀면서 어울리게 되는 경우도 많지만, 여자 아이들은 자아가 강해지기 시작하면 예전의 나처럼 어울리기 어렵다. 영어 실력이 얼마나 준비가 되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많이 알고 오면 답답함은 덜하겠지만 한국에서, 특히 집에서 많이 공부하고 온 아이들 발음이 되려 나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나마 일찍 오면 빨리 교정이 가능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에 이미 발음이 굳어져서 온 경우에는 그것도 어렵다. 물론 외국인 악센트 좀 있다고 미국에서 사는 데 지장 있는 건 전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나도 아이를 키워보니 아이는 내 마음 같지가 않은 날이 많다. 그러니 울 엄마는 당시 나를 보며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당시 엄마가 나에게 잔소리를 했는지, 무조건 포용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또렷이 기억난다 - 집은 나에게 숨 쉴 구멍이 되어 주었다는 것. 학교에서 강한 척, 외롭지 않은 척했던 가면을 벗어두고, 집에서만큼은 한국에서나 영국에서나 변함없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엄마가 이고 지고 온 2년 치 눈높이 수학도 그래서 조금은 기쁘게 풀 수 있었는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