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하지 않는 약속
약속은 배신이 있기에 존재한다. ‘내일 만나’라는 가벼운 말이든 ‘서른 살 봄에 너랑 결혼할 거야’라는 천금 같은 맹세든 마찬가지다. 만일 뱉은 말은 틀림없이 지켜지고야 마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약속’이나 ‘맹세’, ‘계약’따위의 말이 필요할 리가 없다.
물론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꼭 사람의 배신 때문은 아니다. 모든 약속이 사람과 사람 간에 생기는 건 아니니까. 그냥 산다는 게 그렇다. '이렇게만 하면 된다'기에 철석같이 믿고 시키는 대로 했는데, 원하던 결과가 주어지지 않는 일은 너무나 많다. 돌발상황에 대비하여 플랜 B까지는 세웠지만 B나 C에서 대응 가능한 경우보다는, Z 정도는 돼야 들이밀어라도 봤음직한 황당한 변수가 발생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나도 내가 미국에 살 줄 알았더라면 한국에서 회계사 시험 안 봤을 거다. 요컨대 내가 세운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은, 나이가 들수록, 별로 없다는 거다. 거의 따냈다고 생각했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고객 사정으로’ 취소된다. 회사에서 깽판 친 동료는 따로 있는데, 갑자기 내가 엉뚱하게 만악의 주범으로 지목받는다. 조기 승진시켜 준다기에 신나서 갔더니 승진은 커녕, 내 모가지가 위태롭단다. '믿은 사람이 바보 아니야?'라고 하기엔 인간은 그렇게까지 영리하지도, 대담하지도 못하다.
난 그래서 레고가 좋다. 아직 백발의 호호 할머니도 아니고,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자주 찍힌 편도 아니지만 이제는 레고를 마주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숫자에 동그라미가 쳐진 그림 설명서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면 하면, 무질서하게 늘어진 형형색색 부품이 딱 약속한 만큼의 구조물로 변신한다. 약속을 배신하지 않는다. ‘운좋게’ 건물이 하나 더 생기진 않지만, 헛된 고생도 없다. 퍼즐도 비슷하겠지만, 다른 능력에 비해 공간지각력이 유독 떨어지는 나에겐 2D 평면에서 구현되는 퍼즐보다 3D 공간의 레고가 더 근사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레고의 자리는 매년 마련되어 있다. 물론 조립의 기쁨은 내 몫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갑과 을 사이의 관계, 판매자와 소비자 간의 관계. 이 모든 관계에 레고처럼 깔끔하게 틀림없는 매뉴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솔직히 말해 나 같은 사람은 에누리 같은 것도 없어지면 좋겠다. "할머니, 콩나물 얼마예요?" "삼천 원." "에이 이천 원에 주지" "안돼" 옥신각신 끝에 결국 이천오백 원으로 낙찰되는 가격의 변화무쌍함이라니. 도무지 원칙도 없고 패턴도 없다. 어릴 때 엄마 따라 재래시장에 가면 우리 엄마뿐 아니라, 사방의 모든 빠글빠글 파마머리 아줌마들이 실랑이를 펼치고 있어, 정가 그대로 사면 왠지 바보가 될 것 같았다. 남편은 미국에서 십여 년 전 매트리스 가게에 들어가서 호기롭게 정가의 반값으로 후려쳤다가, 뿔난 가게 주인에게 “안 팔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황당한 건 바로 옆 가게에서 내가 똑같은 매트리스를 반값에 샀다는 점이다. 그때까지 가격 흥정을 자신 있어하던 남편은 한동안 트라우마를 겪었다. 네고란 이렇듯 예측불가능하다.
능력 좋은 사람들은 백화점에서도 가격을 깎는다지만 난 그러지 말고 처음부터 정당한 가격을 제시하되, 잘생겼다고, 말투가 사근사근하다고, 좀 더 집요하다고 깎아주지 않으면 좋겠다. 종잡을 수 없는 흥정이란 너무 어렵다. 흐릿한 불빛 아래 노안으로 자그마한 부품들을 찾아야 하는 레고 조립보다 훨씬.
언젠간 이 호그와트 성을 조립하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