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의 기억 한 단면을 장식하고 있는 영화, 미세스 다웃 파이어.
은발의 곱슬머리, 길게 미소 짓는 입, 붕 뜬 듯 어색한 하이톤의 목소리. 그래도 그 당시 어린 나의 눈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분장이었다. 떠올려보기만 해도 동화될 것만 같은, 보고 또 보고 싶었던 그 장난기 가득한 미소.
어렸을 땐 최고의 아빠 '미세스 다웃 파이어'만 보였지만 엄마가 되어 떠올려본 그녀? 는 남편인 다니엘로도 다가온다. 세상엔 웃음만으로 때우기 어려운 현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버려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키우며, 오랜만에 아이의 마음이 되어보기도 하는 그런 때에는 문득, 우리의 편 '미세스 다웃 파이어'가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는 어딘가에 분명 있었을 텐데, 두리번대는 사이 나도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 경계는 어디쯤이었을까. 어른은 어른, 아이는 아이. 어렸을 때 본 세상은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 알고도 침묵하는 어른. 정말 아이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어른은 없는 것 같았다. 써니를 제외하고.
써니는 중학생 때 다니던 학원 선생님이었다. 써니는 이혼녀였고 싱글맘이었다. 학원 원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풍선껌처럼 퍼져 있었다. 써니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느 여중생들보다 장난기가 많고 발랄했다. 그런 써니가 어느 날 나에게 떡볶이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추며 말을 걸어주었다. '너 인형처럼 생겼구나!' 그런 말은 전 후로도 들어보지 못했기에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을지언정, 내성적이고 잘 웃지 않았던 사춘기 여자아이에게는 잘 잊히지 않는 말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웃게 하고 싶었던 거였다. 선생님의 털털한 미소, 그리고 마주 앉아 먹었던 떡볶이는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그때 좀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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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웃게 해주고 싶어
아이를 낳고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이다. 어떤 엄마든 그렇지 않으랴. 하지만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운다. 그냥 운다. 배고플 때, 졸릴 때, 잠에서 깰 때, 낯설 때. 그렇게 울음에 각성되다 아이가 웃기 시작하면 딱 그 순간 미치도록 행복해진다. 신기하기도 해서 웃는 걸 한 번 더 보려고 엄마는 누구나 코미디언이 된다. 원래 웃긴 사람? 유머 감각? 그딴 거 필요 없다. '까꿍' 하나로도 아기는 자지러지게 웃고 얼굴을 쿠션으로 가렸다가 까꿍 하면 데굴데굴 하며 웃는다. 나는 슬랩스틱처럼 쿠션으로 얼굴을 가릴 때마다 표정을 계속 바꿔줬는데 그렇게 하면 아기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갈 듯 웃고 자지러졌다. 평생 남을 웃기는 재주는 젬병이었는데, 이건 너무 만만했다?!
돌아보면, 그렇게 웃겨주며 키우느라 육아의 고됨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것 말고도 좋은 점이 참 많았다.
첫 번째, 엄마를 정말 좋아하게 된다. (아이는 당연히 엄마를 좋아하기 마련인데 무슨 헛소리냐 할 수도 있지만) 훈육 이전에 애착이 먼저라는 건 육아서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아이가 엄마 껌딱지가 되면 힘든 점은 분명 있어도 엄마를 좋아하는 아이의 양육은 한편으론 쉬워진다. 함께 웃고 나눈 시간이 찐할수록, '안 돼'라고 다섯 번 말해도 귓등으로 흘릴 게 세 번이면 되고, 세 번이 한 번이 되는 경험을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말을 듣고, 그건 어른이나 아이에게나 모두 해당되는 진리이다.
두 번째,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이 생겨난다.
'회복 탄력성'이라는 개념이 육아에서도 중요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원래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힘을 일컫는 말로,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있는 능력으로 여겨지며, 마음의 근력이라고도 부른다. 탄력성이 높은 아이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에밀리 워너의 '회복탄력성' 정의)
1) 아이의 부모가 문제가 있을 경우 이를 대신할 수 있는 건강한 대리 부모가 있음
2) 뛰어난 사회적 기술과 의사소통 기술이 있음
3) 삶이 힘들어질수록 다른 곳에 집중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배출구가 있음
4) 낙관적인 미래 기대가 있음
5) 종교적인 믿음이 있음
2, 3, 4번에서도 그 연관성을 볼 수 있지만, 회복탄력성에 있어서 유머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굳이 자료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힘든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긍정적인 면을 바라볼 수 있으려면,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발견해 내는 힘이 필요하다.
여러 사람을 접해보지 못해 낯가림이 심하고 기질이 예민한 두 아이가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중국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을 때, 그나마 잘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도 '유머'였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누구나 유머감각을 타고나며, 말이 통하지 않아도 웃음은 통한다. 단순히, 아이들은 웃긴 것을 좋아한다. 그게 장난이 되느냐 유머가 되느냐의 기로에 서서 유머를 잃고 장난만 늘어간다면, 어느 순간 장난으로 대변되는 그 유머 감각이 종식되고 마는 순간이 오는 것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아직까지는 7살, 5살 아이들이 장난을 분별력 있는 유머로 승화시키는 날이 오기를 나 역시 간절히 희망하고 있는 중이다.
세 번째, 유머는 관찰력이다.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에서 낄낄대고 웃는다. 예를 들면 책의 표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키득거린다든지, 걸음을 멈추고 본 것을 또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킬킬댄다든지. 어떤 때는 책 표지에 있는 소방관 아저씨 한 명의 얼굴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리게 보이는 걸 가지고도 좋다고 깔깔대고, 또 어떤 때는 사진 속의 내가 멀쩡하게 웃고 있는 표정을 보고도 배를 잡고 웃어댄다. (드물게 잘 나온 사진인데) "뭐가 그렇게 웃겨?"라고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아이가 나중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실없이 웃었던 포인트들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다. 눈이 좀 삐죽한 모습을 옮겨 그리고 킬킬대고, 눈동자를 크고 새까맣게 그리고는 킥킥대기 시작하더니, 웃음 포인트에서부터 시작해서 표정과 세부 묘사가 제법 세밀해졌다. 마냥 실없이 웃고만 있는 줄 알았더니, 유머는 관찰력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유머는 형제의 싸움에 특효약이라는 것.
화가 많이 났을 때 웃기는 건 역효과지만, 화가 조금 수그러들려 할 때의 웃음은 종이 위의 물감처럼 삽시간에 번져나간다. 매번 웃음으로 감정을 얼버무려서도 곤란하겠지만 사소한 갈등이나 감정은 웃음 하나로 녹아버리기도 한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질투심이 폭발했던 첫째에게, 둘째와 잘 놀아주라는 말을 하는 대신, 동생을 웃겨주라고 했다. 엄마가 하면 잘 안 웃는데, 네가 하면 웃더라 라는 말을 슬쩍 흘리면서.. 그러면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첫째가 둘째에게 까꿍 하고 둘째는 까르르 웃었다. 동생을 어찌나 잘 봐주는지 모른다고 그때서야 칭찬을 뚝뚝 흘리면 두 아이의 얼굴이 마냥 방실댔던 걸 기억한다.
너희가 앞으로도 함께 마주 보며 웃는 날이 참 많았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 넷이 웃고 웃기는 게 언제까지나 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생의 파도를 만나는 날이 오더라도,
파도 속의 미역 줄기 하나 주워 올리며 잠시 낄낄댈 수 있는 너희들이라면 좋겠다.
오늘도, 우리, 웃자! ^^
사진 : Pexels /Alex G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