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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Aug 03. 2021

사이좋게 놀지 않아도 돼

형제의 감정 - 경쟁과 승부욕

갓 태어나 누워만 있던 아기는 뒤집기를 배우고, 배밀이를 배우고 장장 1년가량이 지나서야 두 발로 딛고 걷는 법을 배운다. 심지어는 입을 옹알대다 의미가 있는 단어를 내뱉기 시작한다. 아기 스스로도 놀라울 것이다. 나는 이런 어려운 것들을 짧은 시간 안에 이토록 멋지게 해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한 도전, 전지전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들이 마음에 벅차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부모라는 훌륭한 지지자가 있다. 당분간 경쟁자는 없다. 단독 질주다.


그러다 동생이 태어난다. 우리 집의 경우엔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다. 오호라, 나에게도 동생이란 게 생겼구나. 나는 형아가 되는 거야. 친구 누구누구는 동생 없던데, 나는 동생 있는 형아가 됐어. 형아.


첫째)

누워있는 게 큰 인형 같기도 하고, 못생겼는데 귀엽긴 하네. 그런데 엄마는 자꾸 동생을 쳐다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업어주잖아. 나도 다시 기저귀 차고 싶어. 업히고 싶어. 어라, 이 녀석 어느새 나처럼 걸어 다니네, 아빠 엄마 말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나는 그보다 훨씬 말 잘하는데~ 쪼그만 녀석이 어디 내 장난감을 가져가? 내가 타는 자전거를 눈독 들이다니, 내 장난감을 가져가 놀고 있길래 뺏었더니 이 녀석 이제 나를 때려!?


둘째)

저 장난감 나도 갖고 싶은데 형아가 절대 안 줘. 미워! 엄마가 사 준 새로운 핸드폰 장난감이랑 손전등은 내 거야. 이건 나한테만 있는 거야. 잘 때도 꼭 쥐고 잘 거야. (*실제로 어릴 때 장난감 때문에 너무 싸워서 공용 장난감, 개인 장난감 상자를 구분해 만들어 줬는데 자기만의 장난감이 생긴 이후로 둘째는 좋아하는 장난감을 잘 때도 양손에 꼭 쥐고 잤다. 자다 깨서 손에 없으면 울었고 손에 쥐어주면 다시 잘 잤다.)

이제 나도 걷고 뛸 수 있는데 형은 킥보드를 잘 타네. 나도 이제 말할 수 있다고 엄마가 칭찬해주지만 형은 엄마랑 저렇게 길게 이야기할 수 있어. 나는 튜브 타고 노는데 형은 잠수를 하네, 어푸어푸 코랑 입에 물이 들어가서 너무 아파 다시는 안 해!


둘째에겐 항상 현재 할 수 있는 도전 목표보다 더 높은 목표가 눈에 들어온다. 제 속도로만 가도 충분히 칭찬받을 시기에 도전할 수 없는 과제와 실패를 더 빨리 그리고 많이 겪는다.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포기가 될 수도 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족이라는 작은 집단 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첫째에게 동생이 생기면서 전과 다른 모습들이 생겨났고, 부모인 우리들의 태도도 조금씩 변했다. “첫째가 다섯 살 땐 다 큰 애처럼 대했는데, 둘째는 다섯 살이 되어도 아직도 아기 같아요.” 언젠가 엄마들과의 대화에서 아이 둘 엄마들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했던 말이다. 첫째에겐 동생이 있어서, 둘째에겐 형이 있어서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이들 관계를 대하는 부모로부터도 영향을 받는다. 혼자일 때 보다 자아 형성에 훨씬 더 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두 자매 중 첫째로 자란 나, 삼 형제 중 둘째로 자란 남편, 우리는 아이 둘을 키우기 시작하며 형제 관계로 인한 상처나 부정적인 감정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었다. 특히 남편은 다섯 살 쯤부터 2년 동안 할머니 집에 보내져서 컸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 다른 형제들이 "너희 집으로 가."라고 해서 처음에 피 터지게? 싸웠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자라면서 서운했던 기억 몇 가지를 떠올리며 아이들에게 첫째라서, 둘째라서 겪어야 하는 마음의 짐을 지우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래서 둘이 싸우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고 사이좋게 노는 모습 바랐다.


그렇게 낯선 외국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아이가 외로울 것 같아서, 잦은 출장에 주말부부까지 하며 자주 자리를 비웠던 남편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메꿔보고 싶어서, 아이 둘을 선택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울고 있는 아이들 둘을 앞에 두고 울고 싶어지는 나를 바라볼 때가 잦았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아이들 각각의 입장에 서서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이들이 느끼는 사랑을 똑같이 나눠줄 수가 없었다. 엄마인 내가 좀 더 잘해야 한다고 그렇게 자책하기엔 나눌 수 있는 시간과 인력이 한정되어 있었다. 한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렇게 자책감을 덜고 한계를 인정하는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아이들이 싸우는 건 내 잘못이 아니라 본능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변화는 조금씩 시작됐다.


사이좋게 놀아 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형은 동생에게, 동생은 형에게 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불가피한 경쟁을 인정하고, 자로 잰 듯한 공정함을 들이대지 않게 되었다.


성별이 같고 터울이 짧은 남자아이 둘을 키우면서 동화  대사를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은 거였다. 이기고 싶고 잘하고 싶은 건 이 아이들의 본능이었고 그걸 서로에게 억누르고 양보하라고 하는 것 자체는 자유의 억압과도 같은 거였다. 엄마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아이가 등장하는 영화 속 시나리오 대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이었다. 관찰한 후 등장인물 각각에게 오만하지 않은 평론을 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억지 감정을 강요하지 말아야 했다. 태어나보니 형제였을 뿐이다.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은 부모가 억지로 만들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의 진짜 감정에는 칼날을 들이대지 않으면서 그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내 최소한의 역할이라면 역할이었다. 싸움을 뜯어말리는  에너지를 쏟을  아니라  싸울  있도록, 진짜 감정을  표현할  있도록 공을 들여야 했던 것이다.


때리지 않고, 밀치지 않고, 무조건 빼앗지 않으면서 감정과 의도를 표현하고, 그렇게 표현된 감정이 상대방에게 가서 닿기 시작하는 걸 본 아이들은 서서히 변해갔다. 분노와 공격에는 똑같이 분노와 공격이 가서 닿았지만, “그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이라서 그래.”라는 말에는 기적 같은 공감이 가서 닿았다. “알았어, 자.” 하고 내미는 작은 손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고마워~ 하고 안아줘~.” 하고 속삭이면 배시시 웃음이 번지며 둘이 어색하게 팔을 감싸 안고는 키득거리며 좋아라 한다. 작은 악동들이 작은 천사로 변하는 순간이다.



처음 보는 공격성이 발현되는 첫째를 보며, 겁이 많은 둘째를 보며, 형제자매가 있는 집들, 그리고 자매로 자랐던 나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며, 많은 것들이 그저 오해와 단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얘는 겁이 많고 소심해. 얘는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어. 얘는 욕심이 많아. 뭐든지 빨리 배워’ 같은 말들..  ‘성격’이라는 너무 쉬운 도구를 활용해 한 사람을 너무 이른 시기부터 단정 지어버리는 것은 조금 잔인하기까지 한 일이 아닐까 덧붙여 생각해본다.


훗날 아이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믿는 사람, 목표한 바를 이뤄낼 줄 아는 사람, 신사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 남과의 경쟁보다 스스로와의 경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가정 안에서의 룰과 에티켓을 배우고 지키며 서로 긍정적인 경쟁을 해나갈 수 있다면 언젠가 홀로 많은 사람들 틈에 섰을 때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믿어본다.



episode 1.

얼마 전 큰 아이가 평영과 자유형을 마스터했다. 처음으로 두 가지 영법을 사용해 레일 끝에서 끝으로 왕복에 성공했다. 우리 모두 박수를 쳐줬고 진짜 멋지다며 엄지를 치켜들어줬다. 둘째는 형아에게 펭귄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리고 둘째는 물을 무서워해 얕은 곳밖에 들어가지 못했었는데 깊은 곳에서 튜브를 잡고 발차기로 앞에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 "형아 이것 봐!" 엄마 아빠보다 형에게 더 먼저 자랑한다. 큰애가 우리가 했던 모양새 그대로 엄지를 치켜들며 제가 더 으쓱댄다. "아기 펭귄~ 진짜 잘했어."  


episode 2.

중국 유치원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 ‘학교 예습 반’이라는 게 있다. 유치원 외 학원에서 따로 이 과정을 가르치기도 한다. (幼小衔接) 그런데 이 과정의 학습이 만만치가 않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는 소위 우수 멤버들이 있었는데 이 아이들이 학습 진도를 이끌어갔다. 큰 애는 유치원에서 유일한 외국인이라 특히 중국어 부문에 있어서 그 아이들과 동등하게 잘할 필요가 없었는데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여기서 더 이상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하고 있었는데도. 졸업 전 몇 달간 유치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시험을 봤던 원인이 컸다. 어느 날 아이가 반토막 난 시험지를 가지고 와서 펑펑 울었다. 안타까웠던 남편과 나는 아이를 위로하려고 말했다. 우리는 너그러운 부모라는 자부심과 옅은 미소를 장착하고,  “우리는 네가 어떤 점수를 받아오든 상관없어. 1등 안 해도 돼. 괜찮아.”

그러자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며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는 내가 꼴찌를 해도 상관없어? 진짜?” “나는 잘하고 싶은데, 누구누구 보다 잘하고 싶은데 엄마 아빠는 안 그래?”

순간 아이 말에서 잠깐 마음에 스치는 게 있었다. 상관없지는 않았다. 그건 너의 본능이기도, 나의 본능이기도 했다.

공부를 강요받고 자라온 나는 아이도 ‘공부 안 해도 돼’ ‘잘하지 않아도 돼.’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는데, 학습을 강요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는 순수한 승부욕으로 본능으로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나 역시 순수한 감정으로 아이의 마음을 존중해 주며, 같이 안타까워하고 같이 기뻐해야 했다는 것을. 그리고 경쟁이란 남을 이겨야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어야 진정한 승리일 수 있다는 것이 아이 마음에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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