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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Jun 19. 2021

사랑도 배울 수 있나요?

형제의 감정 - 사랑

올망졸망 작은 남자아이들 둘이 주거니 받거니 역할놀이를 한다.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푸쉬, 푸~ 꽝꽝.” 입으로 효과음을 내느라 침이 사방으로 튀긴다. 저녁 준비할 시간이 되어 슬쩍 빠져보지만 아이들의 놀이는 끝날 줄을 모른다. 아이들이 신나게 놀이에 빠져있는 동안 여유롭게 저녁 준비를 하며 생각한다. ‘와 둘이 잘 노니까 정말 좋긴 좋네.’라고.. 안고, 업고, 어르고 달래고, 아이 잠든 시간에 겨우 식사 준비를 할 수 있었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시간 참 빠르다.


아이 둘 이상인 엄마들이라면 누구나 입을 모아 얘기할 수 있다. ‘둘이 잘 놀아서 좋아, 둘이 잘 노니까 편해.’ 하지만 또 둘이라서 입을 모아 얘기할 수 있는 건 ‘둘이 싸워서 힘들어.’ 일 것이다. 둘이 잘 놀아서 기특하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등 돌리면 지지고 볶고 싸우곤 했으니까. 둘이 알콩달콩 재밌게 노는 모습이 너무 예뻐 둘 낳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가, 뒤돌아서면 전쟁터가 따로 없는 모양새를 보고는 머리가 지끈해지기도 다. 그런데 또 그 벌로 정해진 자리에 잠시 앉아있으라고 하면 5분도 안되어 언제 싸웠냐는 듯 둘이 마주 보며 키득거린다. 이미 웃음보가 터져버린 아이들은 나의 꾹 다문 입과 뾰족해진 눈을 살살 살핀 다음 입가에 미소를 가동한다. 입이 헤 벌어지고 나면 게임 끝!




싸우면서 큰다고들 한다. 맞는 것 같다.

조금씩 치고받고 해도, 싸우면서 큰다고 한다. 남자애들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다 점점 머리가 크고 밖에서 배워온 욕도 조금씩 하고 주먹다짐도 오간다고 한다?


나는 자매로 자라서 형제들의 성장 과정에 대해선 잘 몰랐는데 삼 형제로 자란 남편으로부터, 시어머니로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듣곤 했었다.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게 싸우고 치고받고 하면서 크는거야 라고.. 정말 원래 그럴까?


서점에 나오는 육아책 베스트셀러엔 관심이 없었지만 남자아이, 형제 육아에 관한 책들엔 관심이 갔다. 전문가들의 책은 하나 둘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내 주변의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육아 동지들, 그리고 그들의 육아관에는 관심이 많았다. 아이를 키우며 내 마음속 내면 아이를 들여다봤고, 내 아이를 키우며 다른 아이들의 성장도 소중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육아에 대한 나만의 확신도 가지게 되었지만, 궁금증 또한 커져갔다. 그렇게 아들 육아에 한 책 몇 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름답게 마무리된 결과와는 별개로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던 건 아들 육아에 대한 고충, 공감대의 한계, 그리고 가오충과 어깨빵이었다. 어릴 때는 엄마의 체력을 고갈시키고, 좀 더 커서는 대들고, 더 커서는 공감대가 단절되어버리는 그런 관계. 친정엄마부터도 “딸만 키워봐서 몰랐는데 아들들이라 쪼그만 할 때부터 억세네. 처음부터 잘 잡아놔야지 좀 더 커서는 네가 휘둘리게 생겼다.” 며 “너도 딸은 하나 있어야 하는데.”라고 하셨다. 현재 눈 앞의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한 7살, 5살 아들들에게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 치고받고 싸우는 게 당연한 아이보다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태도와 예의 바른 말투를 가진 아이로 자라나길 바란다. 해야 하는 일은 스스로 할 줄 아는 아이, 마음이 밝고 따뜻한 아이가 되길 바란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는 이런 바람은 과연 비현실적인 소망일까? 아니면 우리의 현실이 비현실에 가까워져 버린 것일까?


물론 모든 모자 관계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많은 엄마들이 아들과의 공감대를 찾기 힘들어하거나 딸과는 다른 종류의 소통의 부재를 겪는다. 어린 아들 둘 엄마인 나에게, ‘이때가 제일 좋아’라는 말들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0살부터 7세 정도 까지, 학교라는 조금 더 넓은 사회를 경험하게 되며 본격적인 학습과 경쟁이 시작되기 전인 지금 이 시기.  장성한 아이를 둔 엄마들이 종종 인생 가장 행복한 시기로 꼽으며 되돌아보는 시기, 그러나 너무 뜨겁고 찬란해서 그 가운데 있는 우리는 쉽게 지쳐버리곤 하는 그런 시기. 나 역시 몇 년 사이 폭삭 늙은 것 같다는 말을 수시로 내뱉으며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육아의 시간’들을 지나왔다. 누군가 육아의 힘듦에 대해 토로할 때면 뼛속 깊이 동감하는 한편,  지나간 육아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나 행복감을 회상하는 말에 대해서도 절절하게 공감이 되곤 했다. 언젠가는, 그리 멀지 않은 언젠가는, 잠이 부족하고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순간보다 눈 맞춤과 기쁨의 순간들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연약한 존재의 보호자로서만 존재했던 관계가 눈 맞춤이 되고 소통이 되고 사랑이 되는 시간들을 지켜보며, 나는 너와 나 우리의 지금 이 소중한 시간들을 잘 보내보자고 결심했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에 익숙한 아이로 자라나길

아이가 태어나서 7살 정도까지가 아마 부모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 표현을 받게 되는 시기일 것이다. 세상 무뚝뚝하고 엄격하신 우리 부모님이 아이에게 “까르르르~ 까꿍.” 하시며 무한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내가 기억나지 않는 이 시기, 나에게도 부모님이 이렇게 사랑을 표현해 주셨던 때가 있었겠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보통은 이 시기에 아이는 가장 많은 보호와 사랑을 받고, 우스갯소리로 시기에 부모에게 평생 모든 효도를 다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언제부턴가'사랑'이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사랑한다는 표현은 좀 쑥스러울 수 있다 해도 대화를 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손을 잡는 것까지 어색해지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다.


사랑은 언제나 변하고 언제나 숨는다. 그런 사랑을 우리 곁에 두기 위해 할 수 있는 표현하는 뿐이다. 먹이고 씻기고, 장난감을 사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좋은 학원에 보내는 것만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뭐든 걸 다 해주고 싶은 마음도 사랑이겠지만, 그럴 경우 안타깝게도 부모가 아닌 보호자의 역할에 그치고 만다. 어린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사랑받는 , 정확히 말하면 사랑을 표현받는 일일 것이다. 말을 듣고 배우는 것처럼 사랑도 표현 받는 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곱살이 되어도 엄마 앞에서는 응석을 부리며 밥을 떠먹여 달라고 하는 아이는 엄마가 보호자로서 아이에게 하는 행동을 주로 사랑으로 느꼈을 확률이 크다. 그런 행동들로 엄마의 사랑을 확인한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의존한다. 반대로 엄마의 사랑을 표현으로 느낀 아이들은 단단한 내면을 갖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 따뜻한 눈빛, 포옹, 쓰다듬는 손짓,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로.


이 시기에는 부모가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아붓기 쉽지만,  이 사랑이 든든한 토양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아이도 스스로의 감정말과 행동으로 적절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잠들기 전 아이에게 ‘00야 사랑해’라고 말을 건네면 아이도 ‘엄마 사랑해.’라고, 둘이 싸웠을 때 잘못한 사람이 스스로 ‘미안해’라고 말을 건네면 상대방은 ‘괜찮아’라고, 목이 말라서 물을 달라고 할 땐 ‘물 주세요.’ , 물을 받으면  ‘고마워’라고 표현할 수 있도록. 형식적인 표현이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지나치지 않고 한 번 멈춰서 바라볼 시간과, 나의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부탁하는 말만 ‘~해주세요’라고 존댓말을 쓰도록 하고 있다. ‘엄마 목말라’와 ‘엄마 물 주세요’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무리 엄마를 불러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아이는 어느새 동물과 식물에게도 사랑을 표현하는 아이로 자라났으며, 자신의 감정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표현하고 먼저 말을 건네는 아이에게는 친구관계도 어렵지 않다. 형제가 싸우다 둘째가 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보면 첫째가 먼저 “미안해. 그런데 이건 형아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대신 다른 거 줄게.”라고 해서 상황이 종료되어 있다. 물론 대신 내민 장난감은 대부분 협상에 실패하지만, 장난감보다 ‘미안해’ 한 마디가 갖는 강력한 힘이 더 커 보인다. 둘째가 간식을 찾아서 우선 손에 하나 쥐어주면 다른 손을 하나 더 내민다. 하나를 더 쥐어주면 양 손에 든 과자를 하나는 제가 먹고 하나는 형아를 갖다 준다. 그리고 과자를 받은 형한테 ‘고마워’라는 말을 들으면 좋아서 팔짝팔짝 뛴다.


사랑을 주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설레고 벅찬 일이란다. 그렇지?

아이가 클립으로 만들어준 팔찌 / 토끼풀로 직접 꽃다발을 만들어서 토끼인형에게 선물해줬던 날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 (너무 심오한 차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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