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은 아파트 단지 가까운 곳,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오늘은 아이들이 원래 가던 길을 조금 벗어나더니 흙을 밟으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손을 흔든다.
“엄마, 빠이빠이~ 우리 정글로 지나갈 테니까 저 쪽에서 만나~.”
보도 블록이 깔린 지름길을 놔두고 저 멀리 보이는 흙길로 종종 뛰어서 돌아간다. 풉. 드문 드문 심어져 있는 나무들 사이로 둘이서 휘리릭 휘리릭, 그 사이로 떨어지는 벚꽃 잎이 깔깔거리는 웃음과 함께 흩날린다. 곧은길로 가는 나는 천천히 걸어도 금방인데, 아이들은 그런 나를 멀리 곁눈질하며 다급해한다. 흠, 그렇담 엄마도 질 수 없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길이 만나는 지점에 먼저 도착해 두 팔을 벌려 쪼그려 앉는다. 저 멀리 아이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진다. 하나 둘,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째가 먼저 두 팔을 벌린 나에게 크게 안긴다. 다른 한 팔은 활짝 열어서 뒤이어 쫒아온 첫째를 기다리지만, 첫째 아이는 뛰던 걸음을 훅 멈춘다. 작은 얼굴 가득했던 미소도 따라서 멈춘다.
동생보다 먼저 활짝 안기고 싶었던 첫째는 나의 한쪽 팔에 안기기를 거부했다. 하, 이럴 땐 정말 팔이 네 개였으면 좋겠다.
어쩌랴, 엄마의 양 팔을 하나씩 나눠가져야 하는 게 형제의 숙명이라면, 두 팔 가득 벌려 한 번씩 더 안아줄 수밖에..
“이그~ 이리 와봐, 엄마가 한 번 더 안아줄게~”
그러고도 터덜터덜 땅만 보고 가는 아이를 뒤에서 한 번 더 팔로 감싸 안았다.
유치원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아이는 “엄마, 한 번 더 안아줘.” 꼭~ 잠깐이지만 으스러져라 안고 나서야 아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도 안 보고 뛰어갔다.
[낯선 질투]
첫째의 질투가 전에 없이 부쩍 늘었다. 둘째가 처음 태어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둘은 타고난 성향이 잘 맞았다. 상호보완적이었다. 서로의 단점을 상쇄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해외에서 키우다 보니 둘 사이에만 있는 끈끈함 같은 게 있었다. 특히 첫째가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중국어 환경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집에 오면 동생을 붙잡고 한국어로 쉴 새 없이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마음이 예쁜 두 아이가 함께 사이좋게 노는 모습을 보는 건 엄마인 나에게 정말이지 큰 기쁨이었다.
그런 첫째의 행동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둘째도 같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조금 더 큰 공동체를 함께 경험하면서 아이들은 보다 다양한 관계 속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아무리 공정하게 대해준다고 해도 그 감정이 아이에게 각각 똑같은 질량으로 다가갈 수 없을뿐더러, 작은 사회에 나가서 겪게 되는 사회적 자아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아이는 완연한 반달눈에 얼굴의 반만큼이나 활짝 벌어지는 입, 넓적하고 둥근 코에 동글 납작한 머리통의 소유자다. 먹는 것도 아무거나 잘 먹어서 통통하고 몸통도 두껍고 탄탄하다. 엄마인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둘째의 치명적 귀여움. 게다가 혀 짧은 중국어까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며 유치원 선생님들 모두 둘째를 많이 귀여워해 주셨다. 아이는 등원할 때 처음 본 선생님에게 무조건 안겼고 특히 둘째를 예뻐하는 한 선생님은 아이 이름 앞에 항상 ‘나의(我的)’~ 를 붙여서 불러주셨다. 그럴 때면 첫째는 관심 없다는 듯 그 옆을 쓱 지나가 친구들에게 뛰어가곤 했고, 언젠가부터 난 그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엔 유치원에서 돌아와 손을 씻는데 첫째가 먼저 세면대 앞으로 올라갔고, 한 발 늦은 둘째가 같이 올라서려고 하자 첫째가 둘째를 밀어서 넘어뜨렸다. 동생이 자기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거나 원하는 대로 놀아주지 않을 때면 별 것 아닌 일에도 심하게 화를 냈고 무조건 동생 탓을 했다. 그러다 한 번은 첫째가 동생 팔을 꽉 쥐어서 약하게 손톱자국을 내고 말았다. 전에 없던 행동이었기에 그 당황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순간엔 이건 절대 안 되는 행동이라고 제지시킬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의 표정을 보면 이것 역시 아닌 것 같다는 감정적 한계가 느껴졌다.
“민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밀었던거야?”
“물통을 여기 놓으라고 했는데 내가 말한 곳이 아니라 자꾸 다른 데다 놨어.”
“음.. 화가 났을 수 있어. 그런데 동생은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네 말을 잘 못 알아들은거 같아. 그럴 수도 있는 거야. 그건 잘못이 아니야.”
“응, 그런데.. (대뜸) 민이 미워 싫어. 없어졌으면 좋겠어.”
“요즘 동생이 밉구나, 그런데 그걸 민이한테 대놓고 말하면 민이가 정말 슬프고 힘들 거야.
네가 느끼는 것 뭐든지 언제든지 말해도 되지만, 만약 그게 다른 사람을 슬프고 힘들게 하는 말이라면 그땐 그 사람에게 대놓고 하면 안 돼.
엄마도 어렸을 때 첫째였잖아. 동생, 그러니까 이모한테 그런 마음이 들었던 적 있어. 그런 감정을 ‘질투’라고 해.
네가 질투 나서 민이가 밉다면 엄마한텐 언제든지 다 말해도 돼.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런데 질투가 난다고 동생을 때리거나 밀친다면 그런 행동은 정말 부끄러운 거야.엄마한테 말로 하면 언제든지 귀 기울여줄 수 있지만 밀치거나 때리는 행동을 하면 우선 안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 네 얘기를 먼저 들어줄 수가 없어. ”
(끄덕끄덕)“그런데, 엄마도 그랬어? 그래? 음.. 사람들이 다 민이만 좋아해. 나는 안 좋아하고. 너무너무너무 질투나 엄마.”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아파왔다. 알고는 있었지만 질투의 감정은 당연시했던 반면, 그로 인한 인과관계는 모른 척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성 뒤에 가려진 아이의 진짜 감정을 바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이 입에서 직접 튀어나온 감정의 언어를 듣고 나서야 공감이라는 걸 해줄 수 있는 부족한 엄마였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이의 감정을 똑바로 바라보고 나서야 나는 아이 손을 붙들고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를 시작했다.
그랬구나, 사람들이 다 민이만 좋아하고 너는 안좋아하는 것 같았어? 사실은 그렇지 않아~ 네가 5살이었을 때, 그보다 더 아기였을 때 얼마나 많이 사랑받았게? 처음 혼자 유치원 다녔을 때 생각나? 선생님들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지, 대신 넌 지금 혼자서도 많은 걸 해낼 수 있는 멋진 어린이. 동생이랑 같은 유치원 다니기 전에 둘이 집에서 놀았을 때는 어땠어? 그 땐 안 미웠다고? 왜 그랬을까? 그럼 지금 사람들이 동생을 좋아하고 잘해주는 게 잘못일까? 사람들 나빠? 그냥 민준이가 없으면 좋겠다고 (끄응) 그래, 동생이 없으면 네가 혼날 일도 없을텐데. 하루만 다른 집에 동생 맡겨 볼까? 어때? 등등. 잔치는 주거니 받거니 한참 계속되었다.
대화의 정답은 없었다. 다시 떠올려봐도 쓸데 있는 말보다 쓸데없는 말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지금 느끼는 이 감정에 대해 어떤 말이든 나눠볼 수 있다는 것, 함께 감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난 후, 한결 가벼워 보이는 아이의 맑은 표정을 보며 알 수 있었다. 많은 대화 속의 정답은 아이 스스로가 이미 찾았다는 것을.
나 역시 자매 중 첫째로 어린 시절을 지나왔다. 둘이 싸우면 언니라서 회초리 한 대 더 맞았고, ‘언니가 돼서’ 라는 말을 들으며 양보해야 했다. 아이들에게도 공감보다는 책임과 역할이 중요했던 때였다. 세월이 지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어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이 그때와는 조금 바뀌었다는 걸 실감하기도 한다. 서점에는 각종 육아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엄마들은 똑 부러진다. 자라온 대로 가르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 역시 그런 이유로 이리저리 많이 찾아보고 들여다봤다. ‘이럴 땐 이렇게 하세요’, ‘둘이 싸울 땐 편들지 마세요’, ‘서로 보지 않는 곳에서 따로 혼내세요’, ‘감정을 먼저 수용해주는 게 중요해요. 훈육은 그다음에 하는 게 효과적이에요’ 등등.. 그런 방법과 지침들을 읽고 머릿속에 메모해 두는 건 물론 기본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알면서도 실제 상황에선 적용이 안될 때도 많았다. 인생은, 상황은, 너와 나의 대화는 매뉴얼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 법. 돌이켜보면 그 많은 육아서들보다 나에게 큰 힘이 되었던 건 예전에 만났던 아이 둘 엄마의 눈물과 공감의 감정이었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 어린 첫째 아이를 데리고 지인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어떤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두 아이들이 터울 차이가 많이 나는 남매라 안 싸울 줄 알았는데 첫째는 어린 동생을 매일 괴롭혔고, 그런 첫째를 혼낼 수밖에 없어서 혼내다 보니 첫째에게 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느 순간 받아들일 수가 없더라는 말이었다. 첫째는 첫째대로 엄마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그 엄마는 가슴이 찢어진다며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 분과는 초면이었던 나도, 아이가 하나였던 나도 눈에 눈물이 고였고 마음이 아팠다. 그토록 아이를 사랑하고 마음 아파하는데도, 그 사랑이 첫째 아이에게 가서 닿는 건 어쩐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 후 나는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고 한참 후 둘째를 낳았다. 그리고 가끔 그 엄마의 눈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쯤 그 엄마는 틀림없이 눈물을 거두고 두 아이와 웃고 있을 거라고. 아이의 감정을 자신의 마음과 아프게 포갰던 그 엄마라면.. 그 공감 하나로 아이들의 모난 마음을 잘 보듬어줄 수 있었을 거라고..
아이의 감정을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는 것, 그리고 그 감정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아이와 소통할 수만 있다면 작은 방법들은 조금 틀려도, 아니 조금 달라도 괜찮다는 것을...
조금 질투 나도 괜찮아. 사랑에 질투가 따라오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중요한 건 그런 네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을 받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우리의 대화가 끝나갈 즈음, 눈꼬리를 손으로 쭈욱 내리고, 웃는 입은 또 알파벳 D가 되어 쿵쾅쿵쾅 엉덩이를 실룩대며 다가오는 둘째.
그런 둘째를 보고 웃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첫째는 언제 화내고 울었냐는 듯 ‘하하하하하~ 엘사 엉덩이다!’를 외친다. (둘째의 토실토실 실룩실룩 엉덩이를 겨울왕국 엘사의 뒤태에 비유하다니) 그러면서 벌떡 일어나 눈꼬리를 주욱 내리고 같이 쿵쿵쿵 실룩대며 걷는다.
엘사 엉덩이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 둘째를 보고 첫째에게 몰래 속삭인다. 그래도 좋대~ 형아가 말해주는 건 다 좋대. 민이는 형아를 진짜 좋아하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