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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Apr 08. 2021

함께일 때 보이는 것들

얘는 내가  애들  진정한 타고난 영재야.”

나는 영재는 타고 나는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얘를 보니까 타고 나는 애들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같은 아파트에서 왕래하며 또래 아이를 키우던 언니가 그랬다.


매일 울고 웃으며 엄마랑 교감하던 아이는 정말 쑥쑥 잘 자라주었다. 잠도 먹는 것도 유난히 까다로웠지만 힘든 건 그게 다였다. 매일 만들고 먹이고 또 만들고 먹이고, 재우면 깨고 또 재우고, 그 외에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6개월 즈음부터 책 몇 권을 돌려서 읽어주면 조그만 게 뚫어져라 앉아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돌 전부터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생기더니 하루 종일 종알거리던 외계어는 문장이 되었다. 18개월 정도 되었을 때부터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고, 길을 지나갈 땐 간판 앞에 서서 글씨를 물어보느라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 스스로 가나다라, abcd를 깨우쳤다. 정말 영재인가 했다.


하나를 주면 열을 아는 아이를 보는데, 육아가 힘들리 없었다. 매일 밤 아이를 재우고 나면 남편과 둘이서 “오늘은 글쎄 얘가 ~ “ 로 시작하는 아이의 성장을 주고받기 바빴다.

그야말로 꾀죄죄한 몰골을   마리의 고슴도치가 따로 없었다.


아이는 엄마 껌딱지였다. 남편은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웠고 잠깐이라도 아이를 맡길 곳 전무했다. 혼자 키우다 보니 낯가림이 심해서 일부러 또래 친구도 만들어주려고 노력했지만,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여전히 낯가림으로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 했다. 그래도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이맘땐 엄마와의 애착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고, 너무 무리해서 낯선 환경에 노출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임에 나가면 아이는 주구장창 엄마 옷만 붙잡고 늘어졌고 조금 공격적인 성향의 친구들을 무서워하고 거부했다. 데리고 나가면 “낯가림이 심하다. 또는 남자애가 성격이 이러면 안 되는데~.” 라는 말을 들으며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런 아이에게 동생이 생겼다. 23개월 차이의 남동생.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엄마 껌딱지였던 아이는 한국에 있던 3개월 동안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고, 조리원에 있었던 2주 동안 할머니와 지냈다. 처음엔 생각보다 무척 순조로웠다. 어떤 이야기든 말로 설명하면 잘 통했던 아이는 모든 것을 쉽게 수긍하는 듯 보였고 생각보다 엄마를 많이 찾지 않았다. 마음을 놓았던 나는 정신없는 둘째 육아의 세계로 들어섰다.


둘째 아이가 50일 정도 되었을 때 중국으로 돌아와서 본격 독박 육아를 시작했는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첫째 아이는 그때도 잠을 푹 자주지 않아서 자주 깼는데 깰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엄마를 찾았다. 그러면 나는 둘째가 있던 방에서 달려가 첫째를 다시 재웠다. 둘째 역시 잠이 깨서 울고 있으면 남편이 가서 달래고 재웠다. 매일 이 패턴을 반복하다가 나는 첫째랑, 남편은 둘째랑 따로따로 자게 되었다.


 동생으로부터 점점 엄마를 떼내어 손에 쥐려고 하는 아이 때문에 매일이 전쟁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선뜻 밀어낼 수는 없었다. 첫째로 자랐던 나는 첫째라 감당해야 하는 짐을 알고 있었지만 계속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생겨났고, 그런 상황에서 엄마인 나마저 아이에게 이해하라고 하면 아이가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매일매일 침대에 몸을 뉘일 때 뼈가 조각나고 몸이 으스러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첫째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면, 또 둘째 아이가 꼬물대는 모습을 보면 한 순간도 되는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의지와 생각이 아니라 그저 아이들의 눈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 당시 내가 그토록 육아에 올인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답답해했다.

아이들은 이래도 저래도 잘 커요. 

다 크고 나면 요즘은 자식도 남남이라니까요~


많은 육아책들에서도 엄마의 인생을 이야기하며 ‘엄마’와 ‘여자’로서의 균형을 찾으라 말한다.

그 말에 물론 전적으로 동의한다. 누구보다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일했을 때 썼던 영어는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지금도 매일 영어 원서를 하루 한 장이라도 읽고 미드 한 편씩 보고, 중국어는 팟빵에서 강의를 듣고 있으며, 중국 친구와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도 한다. 중국어 실력이 좀 더 향상되면 현지에서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고 싶다. 일주일에 세 번은 필라테스 운동을 한다. 틈틈이 글도 쓴다. 사 먹는 중국음식이 입에 잘 안 맞아 가끔 외식하는 걸 빼놓고는 매일 집밥을 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한국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식 반찬 배달이 안된다.) 그중에서 글 쓰는 시간이 제일 간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의 1순위는 육아다.


 아이가 크고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시작하는 중이지만, 둘 다 가정 보육했었을 때는 진정 육아가 내 삶의 전부였다. 나 혼자서는 넘어지면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남편과 결혼했고 소중한 아이들을 얻었다. 나에겐 속박이 아니라 자유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나이가 차서 결혼하고 남들 하는 대로 결혼했으니까 아이를 낳는 패턴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혼자 걸어왔던 마음 속 깜깜한 터널을 벗어나서 함께라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내겐 중요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전력을 다 해서 육아하고 나면 올바른 가치관과 깊은 사랑을 가진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다.  그러니까 육아에 힘써야 할 순간은 그 언제도 아닌 지금이라고. 너희와 함께 가기 위해 엄마는 조금 느리게 가는 것뿐이라고.





혼자 있을 땐 몰랐던 것들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보이곤 한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하나를 키웠을 때 몰랐던 것들이 둘을 키우고 나서야 보인다.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부풀었었다. 원석 같은 이 아이를 잘 다듬어주면 보석이 될 거라 믿었다. 책을 읽어주고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고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서 하고, 나아가 관심을 보이는 글씨를 제대로 가르쳐보려고 들이댔고 언어에 재능이 있어 보여서 일찍이 영어 소리를 들려주었다. 중요한 시기에 자극해줘야 제대로 발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어른이 되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빤히 들여다보는데도 아무것도 발휘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를 만들어주기 싫었다.


둘째 아이를 같이 키우며 점점 조바심이 났다. 첫째는 첫째대로, 둘째는 둘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 누구 하나의 마음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 괴로웠다. 둘째를 보느라 한참 밖에서 뛰어놀 첫째를 데리고 나가지 못했고,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첫째 말을 들어주다 보면 구석에서 일명 ‘저지레’를 하고 있는 둘째를 발견하곤 했다. 둘이 함께 행복해지려고 한 건데 그 누구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여러 번 마음속 좌절을 겪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크는 모습을 지켜보며

엄마로서 어리석었던 내 모습을 점점 깨달아갔다.


이 아이들은 서로에게 선물이었다.


첫째는 둘째가 갖지 못한 세심함을 가졌고 둘째는 첫째가 가지지 못한 낙천성을 가졌다. 예민한 기질로 심한 낯가림에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힘들어했던 첫째는 둘째와 매일 친구처럼 놀며 사회성을 길렀다. 양보라는 건 내 것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 넘치도록 가진 것을 나눠주는 기쁨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주는 것이 특권이었다. 그리고 어떤 말에도 잘 웃어주는 둘째를 보며 누군가를 웃긴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를 알게 되었다.


둘째는 하나부터 열까지 형아를 따라 했다. 형을 너무 좋아해서 뭘 하든 옆에 착 붙어 있었다. 첫째가 읽는 어려운 책을 읽어줄 때에도 뜻도 모르면서 옆에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엉덩이가 무거운 아기는 처음 본다고 했다. 스스럼없는 성격에 누구에게나 잘 다가가는 둘째를 보며 첫째도 예민한 경계를 풀었다.


지금도 첫째 아이의 예민한 기질은 여전하지만, 풍부한 상상력으로 세밀하고도 재밌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엄마가 놀아주지 않는 시간에도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서 논다. 앞에 놓고 떠먹여 주지 않아도 해야 할 숙제는 알아서 해놓는다. 7살 5살 어린아이들인데도 소리 지를 필요가 없다. 유치원에서는 목소리가 제일 짜랑짜랑하고 어딜 가든 처음 보는 중국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았던 엄마의 빈자리로 아이들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만약 둘째 없이 첫째를 외동으로, 그 때 그 마음으로 키웠다면 지금쯤 정말 영재였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들이대고 개발해줘서 결국 만들어진 영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아찔하다. 지금처럼 마음이 멋진 아이로는 성장하지 못했을 거란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아이들 각자에게 미처 다 쏟아붓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그 빈자리는 사실 두 아이들이 서로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아를 좋아하는 동생은 처음 봤어. 동생한테 이렇게 다정한 형아는 처음 봤어.



싸우고 화해하고 함께 울고 웃고 

오늘처럼 그렇게 세상에 둘도 없는 형제가 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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