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다. 웃는 입매가 제 엄마를 쏙 빼다 닮았다. 화진. 초등학생 6학년. 소년의 냄새를 폴폴 풍기는 너의 눈빛은 아직도 맑음.
둥글게 쌍꺼풀 진 눈에 하얀 피부, 여자가 봐도 한눈에 반할 것 같은 환함. 옆에 있으면 밝고 힘찬 기운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원원. 초등학생 3학년. 바라보고 있으면 말도 안되는 세상에 말도 안되게 고마워지게되는 너희.
아이들 다섯이 모였다. 우리 집 쭌이 형제, 그리고 쭌이의 유치원 친구였던 곰돌이 녀석, 그 친구의 사촌, 화진과 원원. 학교 입학 후 자주 만나지 못했던 쭌이들과 곰돌이는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1, 2, 3 초간 씩 웃음을 교환하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방향으로 담박질 한다. 둘째 쭌이는 짧은 다리를 재빠르게 놀려 형아들을 쫓아간다.
"안녕?"
"어? 안녕."
나에게 다시 쪼르르 달려온 아이가 말한다. "엄마, 저 형아 한국말하네?"
"응, 엄마가 지난번 얘기해 줬지? 저 형아랑 누나는 아빠가 한국사람이고, 지금 여기서 한국 학교 다니고 있어. 그러니까 너랑 한국어로도 얘기할 수 있어."
아이는 반달이 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끄덕하고는 다시 형아에게 뛰어간다.
아이 유치원에서 친해지게 된 중국 엄마가 있었다. 우연히 얘기를 나눠본 이후 그녀는 자기 집에 우리 가족을 초대했고, 차 마시고 가라고 했다가, 술 마시러 오라고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독일인이다. 그들 부부는 영어로 소통하지만 영어는 유창하지 않다. 우리는 한국인이다. 나와 남편은 그녀와 중국어로, 나와 독일인 남편은 영어로, 그 남편과 아들은 독일어로, 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한국어로 소통한다. 아, 영어를 잘 못하는 남편은 가끔 손짓 발짓도 한다. 언어가 부족해도, 그런 건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우리에게 먼저 손 내밀어준 사람들. 함께 있으면 귀는 어지러워도 마음만은 편한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 우리가 그 집에 놀러 가면 쭌이 친구 곰돌이가 우리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곤 했는데, 다른 유치원 친구들도 곧잘 쭌이가 알려준 한국어로 장난스레 말을 걸어오곤 했으므로 대수롭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곰돌이 방 한쪽 구석에서 한글 낱말 카드를 보았을 땐 정말로 의아했다. 그때 알았다. 그 엄마의 언니는 한국 남자과 결혼했고, 심지어 그 아이들의 국적은 한국이었다. 아~ 그랬구나. 지체 없이 반가운 마음을 꺼내려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곧이어 들려온 말에 귀를 의심했고 현실감을 잃었다.
"아이 아빠와 얼굴 보지 못한 지는 3년이 넘었어. 그 한국 남자는 조선족 여자랑 바람이 났었는데, 그 여자가 돈을 다 들고 한국으로 튀었지. 사업이 꽤 잘 됐었는데. 남자도 그때 한국으로 가서 연락이 끊겼다가 돈이 필요할 때 간간이 연락이 오곤 했어. 아이들과는 그래도 따로 종종 연락하는 모양이긴 한데. "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코로나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꽤 오랜 시간 전부터, 아이들로부터 지지부진 이어져왔던 인연이 완전히 끊기기 시작한 게 3년 전이라고 했다.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빛의 속도로 너에게 갈 수 없다면 몇억 광년이 걸려도 닿고 싶은 존재, 사랑하는 아이들, 나의 가족일진대. 남편이 다른 도시로 발령을 받아서 주말부부를 하며 떨어져 있어야 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손꼽아 기다렸던 금요일 밤들은 애가 닳았었다. 바다 건너에 있는 부모님도 떠올려 보았다. 코로나로 2년이 넘도록 떨어져 있어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전과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앞으로 엄마가 직접 해준 음식을 먹는 날은 지난날에 비할 수 없이 손에 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할 때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야 마는데. 어쩌면 그렇게, 어쩌면 그렇게.
또랑또랑한 눈매에 꼭 다문 얇은 입술을 가진 그녀의 슬픔은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것이리라. 지금 동네의 작은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그녀는 학창 시절 친구보다 훨씬 공부도 잘했다고, '비즈니스 우먼'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영어 발음의 '비즈니스 우먼'과 현재의 그녀 사이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먼저 손 내밀고 싶지만 나의 성숙되지 못한 감정이 그녀에게 동정으로 가서 닿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친구가 언니를 소개해 준 이후, 아이들과도 따로 몇 번 만나자고 얘기가 오갔지만 그때마다의 이유로 불발되었었다. 가족이 함께 만나면, 한국 남자인 남편이 함께 나가면, 아빠가 없는 그 아이들이 아빠의 빈자리를 더욱 크게 느끼지 않을까 마음이 쓰였고, 그 언니도 그랬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국적도 언어도 섞여 있는 세 가족이 처음으로 모였던 일요일 밤.
중국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 독일인 남편은 땅콩이랑 토마토, 빵을 먹었고, 우리는 여전히 입에 딱 맞지는 않지만 익숙해지긴 한 중국식 만두를 먹었다. 아이들은 중국식 탕수육인 꿔바로우를 맛있게 먹었다. 초등 6학년, 4학년, 1학년 둘, 유치원생 둘. 아이 여섯이 배를 채우자마자 곧장 거실로 방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까르르 거리기 시작했다. 함께 있을 때는 누구도 티브이나 핸드폰을 찾지 않았다. 원원이 작은 손수건 하나를 가져오더니 둥그렇게 앉아 그 유명한 '수건 돌리기' 놀이를 하기 시작했으며, 사이좋게 막대사탕 하나씩을 입에 물었다. 식탁에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던 우리는 하나같이 흐뭇한 웃음을 띠었다.
친구가 두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네 둘이 학교에서 항상 1등 해요."
그러고 보니 집에 한국어 책들이 가득했다.
"애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도 계속 여기서 한국 학교 다닐 거예요?" 내가 물었다.
"네, 애들이 중국 학교 가기 싫대요. 한국 사람들 많이 귀국해서 학교에 학생들이 많이 줄긴 했는데, 친구도 다 한국 친구들이고 애들이 좋아하니까 앞으로도 계속 보내려고 해요. 한국어는 학교에서 배우고, 중국어는 집에서 쓰고."
"있잖아요, 저희 남편이 다른 건 할 줄 모르는데, 공부는 좀 잘했거든요. 하하하. 학년 올라가서 내용 어려워지면, 저희가 가르쳐줄게요."
배워서 한 번도 쓸데없었던 공부를 써먹어야 할 곳이 생겼다.
일요일 저녁이라 시간이 너무 늦어지기 전 일어나서 갈 준비를 하다, 아차 싶어 화진에게 물었다.
"너, 제일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뭐야?"
"된장찌개랑 돈가스요." 화진이 대답하며 또 씩 웃었다.
"어머, 우리 쭌이도 된장찌개랑 돈가스만 먹어. 편식해서. ㅎㅎㅎ 그걸 제일 좋아해."
우리 쭌이들처럼 된장찌개랑 돈가스를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우리 쭌이들처럼 참으로 미소가 아름다운 소년이구나.. 주책맞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우리 집에 다 같이 놀러 와. 한국음식 만들어 줄게."
"근데 우리 한국말하니까 너무 좋다. 호호호호."
아줌마가 주책인 지, 화진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급 추워진 날씨 때문에 패딩이며 옷가지를 챙기느라 자리를 뜨는 길이 분주하다. 우리는 다음 주 일요일이 아닌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 여유 있게 또 만나기로 했다. 돈가스는 독일의 슈니첼과도 비슷하고, 중국의 튀김 음식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그날의 메뉴는 된장찌개와 돈가스라고 마음속에 미리 찜해둔다. 우리는 좀 통하는 면이 있다.